거대블랙홀과 은하진화를 전공한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부교수는 2014년 10월 서울 강서구 큰나무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기독교 변증 컨퍼런스’에서 이와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관련기사).

지구의 나이가 수백억년이든 1만년이든, 진화가 일어나든 말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백성에겐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교수는 왜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이 컨퍼런스에서 교회의 “극단적인 문자주의”에 대해 반발합니다. 그리고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창조의 기록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신의 창조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은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생물의 종을 분화시킨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이 특별한 (자연계 안으로 간섭을 통한 기적적) 방법이었는지, 혹은 인과관계를 통한 자연적 방법이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가능한 두가지 창조의 방법…과 모순되지 않고 둘 중 하나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거나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즉, 성경본문만을 가지고 창조의 방법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생물의 종을 분화시킨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창세기가 그 방법을 분별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제 생각엔 창세기 기록은 일단 “긴 시간 동안”이라는 표현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육일 동안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육일 창조를 믿기 어렵다면,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 같은 저자를 통해 창조주께서 기록한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 20:11)

사도 요한은 그가 기록한 복음서의 맨처음부터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저는 “극단적인 문자주의”는 아니지만 성경이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를 말씀의 권능으로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창세기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창조 방법이 묘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 존재의 영역 안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말씀의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교수가 말하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생물의 종을 분화시킨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은 만일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육일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창세기를 비유적인 문학표현으로 볼 뿐, 역사적 사실성을 훼손한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역사적 사실성은 인정하나 성경의 표현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다.” 창세기의 기록은 비유적인 문학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출애굽기와 신약의 다른 성경 구절도 창세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비유가 가장 풍성하게 사용되는 시편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노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어쩌면 우교수의 말처럼 그는 창조의 역사적 사실성을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성경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기록한 창세기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관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력영감설에 대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자연영감설이 성경을 순수 인간의 창작물로만 여겼다면, 동력영감설은 성경을 어느 정도 하나님, 어느 정도 인간의 창작물로 보는 견해입니다. 자연영감설 보다는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더 인정한 관점입니다. 자연영감설은 성경이 가질 수 있는 권위가 고작 고대문학으로서의 가치에 불과했지만, 동력영감설은 성경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동력영감설에 따르면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큰 아이디어만 모세에게 영감으로 주셨고, 그 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모세가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를 빌려오든지 해서 말이죠. 마치 인상주의 학파들이 그려낸 그림처럼 하나님은 인간 저자에게 정확한 표현과 단어, 구절을 기록하게 하기 보다는 개념들 예를 들어 사랑, 이해, 용서, 헌신 등을 일반적으로 제시하셨고, 인간 저자가 그 받은 영감에 따라 스스로 여러 가지 문학장치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해 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어느 정도 인간의 책입니다. 그 표현된 단어나 구절들에는 인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문학을 짜집기 할 수 도 있고 다른 문화권에서 빌려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표현된 것들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영감 받은 핵심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성경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창조에 대한 인간 저자의 기록은 그대로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비유적 문학표현에 불과하니까요. 다만 영감받은 부분인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역사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말씀의 권위는 충분히 인정된 것입니다.

창조에 대한 논쟁 뿐만 아니라 동성연애나 다른 여러 이슈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을 위와 같은 논리로 비켜 가면서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사실이며 자신도 어느정도의 권위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많은 신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견해의 차에서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은 과연 인간 저자에게 임한 생각에만 있었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풀어서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모든 예언은 주관적 견해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no prophecy of Scripture comes from someone’s own interpretation). 모든 예언은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단지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 혹은 선지자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그에게 생각을 불어 넣어주시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모세가 주관적으로 써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출 4:15)

모세의 생각이 아닌 모세의 말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 계시록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요한은 단지 계시록에 담겨있는 사상이나 배후에 있는 핵심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에 추가되거나 기록된 말씀에서 제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록된 성경이 담고 있는 사상뿐만 아니라 기록된 말씀에도 하나님의 무궁한 권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성경에 담겨있는 권위는 영생을 좌지우지 할 만큼의 무게가 담겨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책이라는 특징을 갖기 때문에 장르와 문학적 장치들의 법칙에 따라 해석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문자적인 성경해석(Literal interpretation)입니다. 그 장르를 파괴하고 무시하면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부릅니다. 우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극단주의적인 문자주의”를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자적”해석까지 피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표현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의 권위를 갖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연구결과와 고고학적 발견에 따라 성경이 다르게 해석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갖으며 일반계시로서 자연과 만물은 그분의 말씀을 확증해줍니다.

만일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 동력영감설을 가지고 성경을 바라본다면 그는 성경을 여러 가지 문학장치와 장르, 비평도구들로 해체할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참 사상만 하나님의 고결한 권위 있는 말씀이며 나머지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그는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핵심사상은 무엇인가”에 주목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회적, 문화적, 과학적, 역사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 같아보이는 성경 본문의 권위를 쉽게 부정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느정도 하나님의 권위는 인정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그분이 당신의 권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을 온전히 경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꿀 송이보다 더 달게 여겼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7-10)

성경은 어느정도 하나님 어느정도 사람이 쓴 창작물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한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성경에 부여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으며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호흡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조금 더 이 권위를 인정하는 견해를 찾아야 합니다. 자연영감설도 동력영감설도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에 이 권위를 완전히 인정하는 그러나 극단적으로 인정하는 기계적영감설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