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의 구원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무서운 칼날 같은 말씀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3장 6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거기서 세 구절을 내려가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다시 한 번 내 양심을 깊숙이 찌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이런,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며칠 전, 아니 몇 시간 전에 차가 막힌다고 분노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해서 욕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계속해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틀어진 인간관계가 떠오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모르는 자일까요? 이럴 때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구절을 빨리 펴봅시다. 로마서 7장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 훌륭했던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보니 조금 위로가 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입니다.
솔직히 예수님이 좋습니다. 자주 넘어지지만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합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에 깊이 감사합니다. 그분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분을 높이고 싶습니다.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그런데 왜 나는 죄를 선택할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우리에게 두 가지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두 가지 욕구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으로 구분합니다(갈 5:17).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육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욕구도 존재합니다. R. C. 스프로울은 그의 책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고 의를 구하려는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이러한 선한 욕구가 죄로 가득한 내 속에서 다른 욕구들과 날마다 싸울 때, 이 선한 욕구는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순수하지도 않다. 서로 충돌하는 욕구가 없다면 나는 절대로 불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욕구가 나의 유일한 욕구이거나 가장 강한 욕구라면, 자의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죄를 지으려는 욕구가 순종하려는 욕구보다 강하다. 이럴 때는 죄를 짓는다. 물론 반대로 순종하려는 욕구가 죄를 지으려는 욕구보다 강할 때는 죄를 짓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욕구의 수준은 다름 아닌 나의 선택을 통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난다(57p).
우리가 죄를 선택한 것은 그 순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증거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주님이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육체의 소욕은 강렬합니다. 이 강력한 육체의 소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R. C. 스프로울은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 안에 도사린 죄를 이기려면, 죄에 대한 욕구를 줄이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욕구를 키워야 한다(62-63pp)
이는 사도바울의 결론과 일치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그래서 수많은 서신서에서 신자에게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죄를 멀리하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욕구를 줄이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욕구를 키우는 것입니다.
스프로울은 “깊은 정욕의 공격을 받는 순간” 갑자기 이 욕구를 조절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육체의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갑자기 성령의 욕구를 불러일으켜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의 전투력이 그대로인데 전투에 나가 싸울 때 뭔가 내가 노력만하면 이 전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힘은 훈련에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전투에 대비하여 훈련을 하는가에 따라 두 소욕이 전투를 일으킬 때 우리는 승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높고 거룩한 생각으로 채워 그 마음을 새롭게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성향은 강화되고 죄를 향하는 타락한 본성의 성향은 약화된다(64p)
램버트가 쓴 <Finally Free>라는 책에서 그는 포르노그라피의 유혹과 싸우는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을 상담한 경험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택하게 하는 놀라운 변화는 포르노그라피 산업의 심각성이나 그것이 주는 피해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을 때도 아니라고 합니다. 정말 그들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라고 말하였습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하루에도 수 없이 일어나는 죄의 욕구와의 전쟁을 치르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은혜와 그분을 더욱 알아갈 때, 그분을 더욱 사랑할 때, 우리는 죄의 욕구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그 비결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
예전에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까만 개와 하얀 개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더 많이 먹은 개가 이깁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아주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죄에 대한 욕구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욕구 중 무엇이 이길까요? 더 많이 나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이깁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갓난 아기가 어미의 젖을 사모하듯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은데 왜 죄를 선택할까요?
어찌 보면 우리의 삶 가운데 두 욕구가 부딪힐 때, 그 때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어떤 특별한 죄에 더욱 더 자주 넘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내 안에 교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시기와 질투가, 분노가 예수님의 자리보다 더 커져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이제 어떻게 주님을 더 사랑할지 생각해볼 차례입니다. 어떻게 그 죄에 대한 욕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지, 어떻게 주님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서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훈련해야 합니다. 다시 그 전쟁이 일어날 때 승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스프로울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실낱같은 변화의 소망도 포기하게 만드는 엄격한 결정론과 피상적인 행동주의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64p)
어떤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만 외치면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더 나아질 필요도, 더 잘 싸워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그냥 이상적인 표어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동기가 없는 행동주의에 매달립니다. 하루에 몇 번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 변화가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새벽기도 하고, 마음에 부합하는 구절을 노트에 써서 외우고, 합당한 찬양을 크게 부르고…등등 다양한 행동의 변화가 결국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잠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 금새 피상적으로 흘러가고 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라갈 것을 명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변화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들과 전쟁하며 그들을 이겨나가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단련시키십시오. 훈련하십시오.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분을 묵상하며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 앞에 나와 아뢰고 그분을 붙드십시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십시오.
하루에도 수 차례 일어나는 두 소욕의 전쟁에서 전승을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에 승리할 필요가 없다고 포기하는 군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더욱 더 승리할 수 있게 만드실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말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