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항상 영적 각성 운동이 필요했습니다.
신명기에 세 차례 기록된 모세의 고별설교나,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를 들어보면
백성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려고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사들, 선지자들, 왕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계속해서 권면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불순종을 선택한 백성들을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시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그들을 회복시키십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를 통해 무너지고 불타버린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전쟁포로로서 낙담한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기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환경을 개선했다고 해서 반드시 진정한 부흥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웅장하고 아름답던 솔로몬 성전이 건재했을 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율법과 제사제도를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참된 부흥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제발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말 1:10).
그들의 껍데기만 남은 형식주의적 예배를 받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외부적인 것이 다 쓸데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전의 재건과 성벽의 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된 회복의 결실 중 하나였고,
유월절과 안식일을 지키며 제사를 기쁨으로 드린 것도 아름다운 부흥의 모습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은 멀어질 수 있습니다(마 15:7~9).
참된 부흥은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되고
그 힘으로 외면의 결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변화, 즉 영적 부흥을 가져오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기에 빠질 수 없는 한 사람, 바로 에스라입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에스라 7:6)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는 일,
내면의 각성을 일으키는 일,
영적 부흥을 이루어내는 일,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깝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말씀에 능한 학자 에스라를 사용하셨습니다.
에스라는 바로 이 목적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백성들을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로 이것을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디모데는 에스라처럼 성경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자였습니다.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요구하신
장로의 자격도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 – able to teach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익숙한 자들이며
그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 부지런히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포함하여 가르치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 2:15)고 명령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독교 내부적으로도 많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도,
중세시대 암흑기에도, 복음의 부흥기에도, 오늘날도 동일하게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중대한 의무가 요구되었습니다.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을 소유했던 적도 있었고,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던 적도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이 순교를 택하면서까지 복음을 지켜낸 적도 있고,
천막 같은 곳에 모여 수많은 회개와 회심을 맛보았던 적도 있습니다.
외부적인 환경과 물질적인 것들은 계속해서 변해갔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겐 동일하게 하나님과 가까이 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것,
그것은 그분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치명적이고 암울한 것은 없습니다.
교단의 규모, 건물의 크기, 사회적인 영향력,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친밀감,
교인수, 헌금, 그 어떤 외부적인 측량에 따라 교회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소수라고 무조건 질적으로 뛰어나고 순수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에 익숙한 자,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분별하는 자,
그 말씀을 준행 할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연구하고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쉬지 아니하는 자
그것을 위해 삶을 투자하고,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에게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는 자
우리에겐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교단도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커다란 교회 건물도 금새 팔려버립니다.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교회도 변질됩니다.
친밀함을 추구하던 교회도 그 방향과 목적을 상실합니다.
참된 교회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는,
입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예배하는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는 교회는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그것을 따라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에스라, 디모데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교회의 영적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는
다른 것으로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하기 원합니다.
당신도 이 시대의 에스라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시대의 디모데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참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는 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다른 성도들을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권면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