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경해석의 마지막 단계에서 벌어지는 흔한 실수를 다루려고 합니다.
바로 적용 부분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본문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문이 정말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 파악하면
잘못된 적용을 도출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적용을 도출할 때 발생하는 가장 흔한 실수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적용에 있어서 가장 흔한 실수는 바로
본문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명령하지 않은 것을
직접적으로 적용하려는 것
입니다.

이러한 실수는 그 정도에 있어서 차이를 보입니다.
아주 심한 경우는 문자주의적 해석과 동반하여
성경 말씀 그대로를 마치 오늘 따라야 할 행운의 쿠키 문구처럼,
오늘의 운세처럼 따르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존맥아더는 [무질서한 은사주의]라는 책에서
이러한 적용에 대해 “성경 룰렛 게임”이라고 칭하면서
”성경을 아무 곳이나 펴서 자신들이 직면한 고난이나 필요에 적용할 수 있을 듯한
말씀을 찾아보는 것”
이며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주셨다”
말한다고 지적합니다(1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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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이렇게 살아야겠어!”

 

성경을 임의로 펼치지 않는다고 해도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성경 룰렛 게임”과 유사한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성경해석ONE-TO-ONE 초반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누가 누구에게 한 명령인지를 파악하지 않고
성경은 무조건 나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오류를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하신 말씀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도 있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있고,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고 받은 말도 있고,
심지어 당나귀가 한 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태복음 26장 50절)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래, 오늘 내가 계획한 그것을 이루기를 주님이 원하시는구나’라고 말한다면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며
예수님을 잡아 넘기려는 그것을 행하라고 허락하신 장면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적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른 적용은 바른 성경해석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로마서 15장 4절 말씀을 가지고
구약의 모든 말씀을 교회와 그리스도, 구원과 연결시켜 적용합니다.

무엇이든지 전(former days)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그러나 우리는 “위하여”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우리에 “대하여” 쓰여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잘못된 영해와 예표적 해석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적용을 막아줍니다.

 

또 한가지, 이 범주에 들어가 있는 적용의 실수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라고 보는 실수입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서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술이며
서신서처럼 독자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것과
어떻게 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의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이 말씀을 읽고 ‘교제와 예배, 기도에 힘써야겠다’고 적용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죠?

문제는 이 말씀을 교회에게 주신 명령으로 볼 때입니다.

만약 이 말씀이 초대교회가 했던 모습에 대한 기술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든 교회가 시대를 불문하고 따라야 할 절대적 명령이라고 볼 때
우리는 이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매일 모여야 합니다(행 2:46)
집집마다 떡을 떼야 합니다(행 2:46)
자기 소유를 팔아서 성도를 도와야 합니다(행 2:45)
자기 물건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말고 나눠야 합니다(행 2:44)

그렇지 않으면 불순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경을 통해 초대교회 모습을 도출하고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이랬으니 오늘날도 이래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과거의 교회 역시 여러 가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을 봅니다.

과거에는 특별한 형식이나 틀 없는 자유로운 예배를 드렸다고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초대교회가 갑자기 더해진 수 천명의 성도를 수용하기 어려워
임시적으로 집집마다 모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 원리처럼 받아들인 것입니다.

 

케빈 드영이 지적한 것처럼
그들도 곧 “성경 교독, 성찬 지침, 예전적 화답, 기도형식, 축도 형식,
교사들과 설교자들을 위한 다양한 규칙 등을 포함한
특정한 예배 순서”가 있었다는 것을 초대 교회 문헌들은 말해줍니다.

드영은
”교회사 처음 몇 세기 동안 완전히 자발적이고 형식이 없으며
반 예전적이고 매주 달라지는 예배가 드려졌다는 주장은
역사의 명백한 사실을 거스르는 주장”
이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지역교회를 사랑하는가, 159~60pp).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거실에서 드리는 격의 없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지만
교회 지붕 아래서 성경 교독과 정해진 기도와 강해설교 있는
잘 짜인 예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157p)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일어난 사실로 바라보고
오늘날 적용해야 할 원리로서
시대와 환경을 초월한 절대 진리를 찾아 도출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적용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매일 모일 수도 있고, 매주 모일 수도 있습니다.
매일 떡을 뗄 수도 있고, 매주 뗄 수도 있으며,
자발적으로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의 것을 남을 위해 팔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배울 수 있고,
성도끼리 교제하며 교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본질을 실현했는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본질에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부탁하신 그것을 위해 (마 28:19-20)
그들이 전도와 가르침, 교제와 사랑, 섬김에 헌신되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도 따라야 할 본질입니다.
그 본질을 어떻게 실현하는가는 모두의 생각을 획일적으로 통일시킬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한 모습 그대로가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인 형식, 문화, 관습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첫째로 그것은 성경에서 원래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둘째로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가 씌우는 전통의 굴레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 그렇게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비방할 거리가 됩니다.

 

올바른 적용을 위해서 선행 되야 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해석입니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지 않고는 올바른 적용을 도출하기 어렵습니다.

추가적으로 본문이 말하는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1.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배웠는가?

2.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신다고 배웠는가?

3.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떤 모습을 보았는가?

4. 이 본문을 통해 오늘날 주의 백성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더 다양하고 실질적인 방법들이
본문에 따라 주어지겠으나 위의 일반적인 질문들은
적용을 안전하게 도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