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시 쉬어가는 코너로, 그러나 성경해석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는 주제로 칼럼을 써볼까 합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교회에 다니고 계신 분이 있다면 보통 교회에서 어떤 일들을 하십니까?
아마도 주일 아침마다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서 아이들을 선데이스쿨에 데려다 주고
가볍게 커피 한잔을 마시며 성도들과 짧은 교제를 나누다가,
자신이 속한 성가대나 봉사할 곳에 들어가 열심히 사역을 하고
공식적인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말씀을 듣고 바쁜 주일 오전을 보내실 것입니다.
혹시 오후 프로그램에 참석하신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나 구역 혹은 부서활동에 참여하실 것이고
주중이나 새벽마다 모이기에 힘쓰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역과 공부, 말씀을 듣는 시간들을 제외하고
성경해석은 언제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고민이 되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성경해석 교재를 사서 1과부터 차례대로 공부하고 싶은데 시간이 나지 않아서
3, 4과에서 멈추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혹은 성경해석에 대한 공부는 목사님이나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공급받고 싶어서 바쁜 일상 가운데 라디오나 스마트폰을 켜두고
여러 설교를 듣고 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바쁜 삶을 매주 살아가시는 대부분의 성도님들께
저는 성경해석에 도움이 되는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도
성경해석의 많은 원리를 체득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기 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 알만 먹으면 만병통치된다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오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잘 정리한 교재를 통해
배워가는 것은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바쁜 삶 가운데 성경해석 공부를 위해 개인시간을 떼어 놓기가 어려운 분들에게도
성경해석을 공부할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얼마 전 아버지와 함께 제 서재를 수리하였습니다.
벽지를 떼어내고 루버(보통 ‘루바’라 부르죠)로 벽을 꾸몄습니다.
각목을 벽 크기에 맞춰 잘라내고 틀을 만들어 벽에 고정시킨 뒤
루버를 그 틀에 칸칸이 맞춰 붙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목수도 아니고 이런 일이 서툴기 때문에 보조로 나무를 나르고
치수를 재고 필요한 도구를 미리 가져다가
이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하시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이틀 사흘 일을 함께 일을 하는 도중
저는 드디어 승진했습니다! 루버를 벽에 고정된 각목으로 짜여진 틀에
맞춰 붙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갑자기 어떻게 그런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어디서 목공일에 관련된 자격증을 따오기라도 한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따로 목수일에 대한 교재를 가지고 공부했을까요?
그랬다면 아마도 더 전문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제가 기분 좋게 승진하여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수일간 옆에서 지켜본 아버지의 작업현장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루버를 붙이시는지, 간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맞추시는지,
수평자로 어떻게 균형을 맞추는지… 저는 계속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손에 루버를 고정시킬 도구가 쥐어졌을 때,
저는 제가 본 그 원리들을 실제로 적용해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해석을 가장 잘 도와줄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도 이와 유사합니다.
성경해석을 잘 하는 사람의 시연을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해석을 돕는 설교를 듣는 것은
성경해석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체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자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해석하는 겁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역사적-문법적 해석의 원리가
설교의 뼈대를 든든하게 잡아줄 때, 본문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일 때
듣는 사람들은 설교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설교에 일관성 있게 사용된 해석의 원리를 체험 혹은 체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듣는가도 성경해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문법적-역사적 성경 해석 방법으로 공부하면서도
그 방법을 완전히 무시한 설교를 들으며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무엇이 “성경해석을 돕는 설교”인지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저는 한 마디로 “강해설교”가 성경해석을 돕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만,
워낙 “강해설교”에 대한 정의도 이해도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해석을 돕는 설교”의 특징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1. 성경해석을 돕는 설교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설명하는 설교입니다.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요즘 인기 있는 설교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거나
실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거나, 도전적이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거나,
혹은 감정적으로 평안, 기쁨, 위로, 감사를 풍성히 느끼게 해주는 설교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것들은 설교의 여러 가지 결과물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위와 같은 형식의 설교는 아무리 들어도
성경해석의 원리를 체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힘차게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 수 있을까?’
’아~~정말 은혜 많이 받았어~~’ 등등 여러 다른 것들에 두게 만듭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하는 설교를 들으십시오.
그 동안 저희가 살펴본 내러티브(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등의 특징 대로
성경을 문법적-역사적으로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설교를 들으십시오.
본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설교가 아니라
본문을 설교하는 말씀을 들으셔야 성경해석의 원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의 저자의 기록 목적을 설교의 목적으로 삼는 설교입니다.
저는 종종 강해설교의 성공과 실패는(물론 다른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 본문을 기록한 저자가 오늘날 청중 가운데 앉아 그 설교를 듣고는
”맞아! 저게 내가 본문을 기록한 목적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짧게 잡아도 이천 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날 고대의 본문을 선포할 때
수천 년 전과 같은 적용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종이를 쉽게 구하기도 어려운 시대와 스마트폰을 쓰는 시대의 격차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이 가르치는 진리는 동일합니다.
본문에 담겨있는 핵심 원리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용하는 모양과 방법은 달라져도 적용해야 할 원리는 같습니다.
성경해석에 도움이 되는 설교는 그 원리를 가르치는 설교입니다.
성경의 원래 저자가 그 설교를 듣고서 동의할 수 있는 원래의 기술 목적을
설교의 목적으로 삼는 설교를 계속해서 들을 때
우리는 성경해석의 기본원리에 충실한 그 설교를 통해 해석의 원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3. 본문의 요지를 설교의 요지로 삼는 설교입니다.
마크 데버가 쓴 “건강한 교회의 9가지 특징”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로 그는 건강한 교회는 “강해설교”를 하는 교회라고 말하면서
강해설교를 “성경의 특정 본문의 요지를 설교의 요지로 삼는 설교”라고 정의합니다.
요즘엔 컨셉설교가 주를 이룹니다.
성경 본문의 핵심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에 대한 설교를 만들어
그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본문을 읽거나 잠시 언급하거나 심지어 살짝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대부분은 그 핵심 주제를 설명하는 것에 투자됩니다.
청중은 분명한 주제 하나를 얻어갈 수 있습니다.
그 주제는 대부분 헌신, 사랑, 은혜, 용서, 감사, 기쁨, 소망 등
익숙하고 일반적인 주제입니다.
이러한 설교가 우리에게 쉽게 와 닿고 편안하게 전달된다 하더라도
교회를 건강하게 해주는 설교는 “본문의 요지를 설교의 요지로 삼는 설교”입니다.
컨셉으로 주제를 하나 잡아서 하는 것보다는
본문이 말하는 것을 잘 관찰하여
본문이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고 본문이 핵심으로 삼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본문에서 요지로 삼는 것을 요지로 삼는 설교입니다.
그런 설교를 오래 들으면 들을 수록 우리는
설교자의 어휘력이나 설득력이 아니라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더 집중하며 성경해석의 원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4. 본문의 의미만 설명하기 보다는 왜 그런 의미가 되는지 알려주는 설교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점에 동의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그냥 한 마디로 “본문의 의미는 이것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편하고 쉽지요.
그러나 설교자는 잘못된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더 생각하는 설교자는
단순히 떠먹여주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왜 먹어야 하는지,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안의 모든 단어나 표현들에 대해 그러한 설명을 세세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본문의 핵심 주제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왜 그러한지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에게 이러한 본문을 설명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 쉽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연구하여
잘 가르친다면, 성도들은 그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도
성경해석의 원리를 체득하고
단순히 들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사실이며 왜 다른 견해를 거부해야 하는지 신뢰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사역을 설명해주는 설교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결국 성경 말씀의 목적입니다.
말씀이 증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말해줍니다.
설교는 단순히 본문에 대한 해설을 주석 읽듯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통해 우리는 본문이 결국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드러내 보입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주가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고
주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상기시켜 줍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사무엘, 에스라, 여러 선지자들…
그들의 설교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하신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통해 사회적 비판을 할 수도 있고,
자아성찰이나 자기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격려나 위로를 받아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그러한 효과를 가져오지만
그 효과를 가져오는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사역입니다.
그분을 더 알아갈 때, 그분이 하신 일의 의미를 더 알아갈 때
우리에게 참 위로와 격려, 기쁨과 소망, 그리고 회개와 두려움이 생깁니다.
말씀을 말씀처럼 가르치는 설교를 듣는 것은
성경해석의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에 도움을 줍니다.
요즘엔 인터넷에 설교가 쏟아져 나옵니다.
설교 영상이나 음성이 하루에도 수두룩하게 업데이트 됩니다.
무엇을 듣는가? 무엇을 보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건강에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가 이 칼럼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성경해석의 원리를 배우는데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위에 제시된 몇 가지 원리들을 고려해보시면서
무엇을 들을 것인지 잘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에 대해 알아가고, 주님을 증언하는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