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었구나!”

초행길에서 일방통행인 골목에 역방향으로 잘못 들어가거나
국도를 찾아가다가 실수로 고속도로에 들어서게 되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종종 이러한 실수를 합니다.
원래 가야 할 길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급히 돌아가기 위해
핸들을 바로 잡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우리는 길을 잘못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잘못 되기 전에, 너무 많이 나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올바른 길을 찾아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리처드 L. 슐츠가 쓴 <문맥: 성경이해의 핵심>이라는 책에서
”제 6장 전거삼기에 대한 경고”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성경 본문을 잘못 적용하게 되는 대표적인 여섯 가지 경우를 다루어 보려 합니다.

우리는 성경 해석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급히 적용으로 이끌어오는 과정에서 생기는 미숙함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잘못된 길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성경해석의 길 중에서 뭔가 잘못 가고 있다고 느끼고
다시 올바른 해석의 길로 돌이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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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사성이 부족한 상황

슐츠는 성경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다음과 같은 관련 질문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1. 우리가 순종할 명령이 있는가?
2. 우리가 요구할 약속이 있는가?
3.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가 있는가?
4. 우리가 피하거나 자백해야 할 죄가 있는가?
5. 우리가 감사하거나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유사성이 부족한 상황의 적용은
성경 본문의 배경이나 문맥과 전혀 다른 오늘날의 환경 속에
성경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으로
예를 들어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내 백성”이라는 표현을
무조건 교회로 적용한다든지, 유월절은 주일, 제사는 예배, 제사장은 교역자
이런 식으로 당시 환경과 문화, 역사와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내는 적용을 말합니다.

예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

이 말씀을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오늘날로 적용하여
그러니 ‘우리는 성경교사나 신앙서적 따위가 필요 없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

요한은 지금 거짓교사가 가르치는 새로운 가르침들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26절)
처음부터 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고수하라고 말합니다(24절).
그래서 요한은
아무도 너희에게 새로운 뭔가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오직 성령께서 전에 들었던 그 진리를 확고하게 해주실 것이며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문맥을 벗어나거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것들을 오늘날과 잘 연결시키려는 노력 없이
바로 적용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해석을 만들어내기 쉽습니다.

먼저는 성경 자체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제대로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2. 시대착오

첫 번째와 비슷한 것으로
”성경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그것을 현대적 범주나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예로 예수님은 탁월한 교사이셨다” 혹은
”예수님은 뛰어난 경영자셨다,” “리더이셨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성경에서 원리를 바로 도출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예화, 문답교육이 바로 이상적인 교육방침이라고 주장하거나
산이나 들에서 수업을 듣는 것이 자연친화적이며 효과가 높은 교육이라고 말하는 등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된 복음서를
바로 오늘날의 수업현장, 기업 경영에 끌어와서 도입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적용입니다.

때론 설교자들이 예수님의 설교 방식에서 배우려는 목표 아래
예수님의 비유설교기법을 복음서에서 따오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비유의 목적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설교기법으로 차용한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일부 성도들을 심판하기 위해 듣고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설교를 해야 할까요?
(비유설교와 설교에 비유를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3. 심리학적 고찰

이것은 성경 인물에게서 표현되지 않은 생각과 동기를 보완하기 위해
본문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상상해 내는 것입니다.
보통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6장 말씀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가 부정한 입술에 대한 고백을 하며 그 영광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가리켜 이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참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고 자기 힘을 의지하여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성경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또 오병이어를 가져온 아이의 이야기에서
그 아이가 부끄럽지만 ‘이거라도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렸을 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이루셨다는 설교를 종종 듣습니다.

문제는 성경은 그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조금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람들의 감정을 강조합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

4. 부적절한 일반화

슐츠는 이에 대해
”본문상의 충분한 지시가 없는데도
성경의 특정한 진술이나 상황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용사시니”(출 15:3) 말씀을 가지고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사로서의 용맹스러움, 공격성을 닮았다고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성, 여성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분이시며
”여호와는 용사시니”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전능하심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적용하라고 주어진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우리 삶에 적용하려 할 때,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예시하는 간접적인 원칙만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교훈까지 자연스럽게 일반화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본문에서 묘사되는 특정한 개인이나
어떤 상황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대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해당 본문이
이 같은 일반화를 용납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화될 수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나 강조점과,
일반화되어서는 안 되는 특정한 세부 내용을
구분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212~3pp)

5. 집단적 맥락의 개인화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민족 내의 열두 지파
또는 신약시대의 지역 교회와 같은 특정한 그룹과 관련된 본문을
한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
입니다.

보통 예언서, 선지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 심판의 말씀을 오늘날 개인에게 직접 적용할 때 많이 일어나는 오류입니다.

사실 어떤 경우는 그 집단에 소속된 개인으로서
동일한 원리 아래 놓여지기 때문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개인적인 욕구과 관심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대인의 개인주의가
성경이 본래 기록된 목적과 대상이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든다고 경고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하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사람들은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있었지만
신약시대는 이제 모든 사람이 제사장라고 이 본문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도 민족으로서 모두가 제사장 나라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말씀은 “너희”라는 복수를 사용하여 소아시아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교회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벧전 2:10).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떠나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이지만
그들 가운데 제사장 역할을 할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신약에 와서 이 본문을 가지고 이제 모든 개인이 제사장이니
특별한 제사장 기능과 역할을 할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본문은 교회 전체를 가리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고
목회서신서에 분명하게 등장하는 장로와 집사의 자격,
고린도전서에 여러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주어진 은사들을 보면
이 본문이 신약시대에 직분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구약과의 차이는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을 통하여서 제물을 바치는 것이 필요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인간 제사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6. 영적 해석

마지막은 흔한 형태의 오류로 영적 해석, 즉 영해입니다.

저자는 보통 구약의 역사서, 내러티브에 대한 영해가 심하다고 말하면서
거의 모든 세부 내용에서 영적 메시지를 찾는 것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삭의 아내를 찾아 떠나는 늙은 종 이야기를 삼위 일체 하나님과 교회의 이야기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성도와 사탄 혹은 세상의 어려움과의 전쟁으로,
아브라함의 집에서 키워진 종들을 성도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야기로,
성막의 모든 장막 말뚝과 입구의 넓이가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성품에 대한 상징으로
이렇게 영적 의미를 도출해내는 방식의 해석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본래 쓰여진 목적과도 다르고 당시 독자들이나
신약시대 성도들이 이해했던 의미와도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시편)가 가리켜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구약의 모든 내러티브와 시편, 선지서의 내용이
예수님의 성품이나 사역과 일대일로 대응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다루기 원합니다.
모든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으려는 노력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예수님을 구약에서 찾을 수 있는지 다루기 원합니다.

오늘은 슐츠가 분류한 여섯 가지 잘못된 적용의 방법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떠나 급하게 적용으로 도출할 때 생기는 문제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쉽게 오늘날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적용을 위해,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이 중요한 일에 대한 것을 말할 때 집중하듯이 말입니다.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 천지 만물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시며
아들을 우리를 위해 아낌 없이 내어주신 분의 권세 있는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얼마나 더 귀 기울여 진지하게 자세히 들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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