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t-43485413936_xlarge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설교입니다.

강해설교의 최종 목표는’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설교에 반드시 포함 되야 하는 부분이지만 처음 두 가지가 확실히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적용이기도 합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위해 설교자는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야 합니다. 단어와 문장, 문맥과 장르 등 많은 것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 설교자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본문이 쓰였던 당시 시대 배경과 문화적인 요인들을 분석하고 당시 본문의 독자들이 겪었던 문제들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의 의미를 문맥 안에서 잘 해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자신이 관찰하고 해석한 내용을 잘 정리하여 말씀의 권위를 힘입어 담대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강해설교를 듣는 분들 가운데 ’설교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왜 어려울까요? 왜 어렵게 들릴까요?

다음은 제가 생각한 강해설교가 어렵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첫 째, 어떤 성경 본문은 그 자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도 어떤 말씀들을 이해하기 어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설교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가 이해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편재하시며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하고 제한적이며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리를 얻기 위해 많이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것은 그냥 패스하고 이해하는 것만 들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진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그 말씀의 권위와 말씀하신 이의 사랑의 무게는 그분이 하신 그 어떤 말씀도 흘려 보내거나 간과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적 사실이나 철학적 명제, 법적, 정치적, 문화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이해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내 주위에 일어나는 일도 때로 이해하는데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진리를 다루는 말씀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의 복과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이 담겨있는 그 말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것입니다

강해설교가 어려운 이유는 성경이 이해하는데 노력이 필요한 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둘 째, 성경은 일차적으로 고대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후에 누군가가 2015년의 한국 교회에서 전해진 말씀을 다시 들어본다면, 그리고 그 설교를 듣던 중에 신천지와 구원파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은

구원파가 뭐지? 신천지는 뭐야? 무엇을 가르쳤고 어떤 영향을 끼쳤길래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지만, 이천년 후에 그것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것입니다. 이천 년의 갭은 생각보다 큽니다.

구약성경은 그 보다 훨씬 더 큰 갭을 갖습니다. 신약도 마지막에 쓰인 계시록이 거의 이천 년의 갭을 갖습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시기에 쓰인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유대교와 영지주의에 대해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앗수르와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미친 영향과 신약에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당시 로마가 지배했던 이스라엘의 환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원래 쓰였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성경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선지식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해 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러한 배경과 문화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원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bridge

강해설교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왼쪽에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고대 문화와 언어, 시간과 상황을 설명하면서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오른쪽 세상의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었다면, 구약시대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혹은 신약시대 보통 유대인들처럼 구약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면 강해설교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만큼 간단하고 명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구약의 율법을 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이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관습과 문화도 잘 모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구약 어디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위대함과 그것이 결국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강해설교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강해설교는 다른 어떤 형식의 설교에서 맛볼 수 없는 풍성하고 놀라운 진리의 참 맛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셋 째, 전달자의 미숙함 때문입니다.

저도 강해 설교자로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같은 주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면 아마 우리는 그 놀라운 권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단지 내가 공부한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얼만큼 아는지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잘못된 의도가 있다면 그것이 설교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전하기 원하는 열정과 소명이 있는 사람에게도 미숙함은 존재합니다. 전달하는 능력이나 어조, 또 청중과 커뮤니케이션을 끌어가면서 하기 보다는 설명, 나열하는 식의 설교를 할 때 집중이 덜 되는 문제 등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미숙함은 언제나 강해설교가의 큰 숙제입니다. 사실 강해설교는 준비기간이 깁니다. 그도 그럴것이 본문의 원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내용을 잘 소화하여 전달하는데 아직 충분히 소화되지 않아서 생기는 미숙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 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질 수록 그러한 미숙함은 조금씩 사라질 것입니다.

현재 청중이 얼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잘 파악하는 것도 강해설교가의 과제입니다. 창세기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데 창세기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현현을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근 차근 서두르지 말고 하나 하나 친절하고 쉽게 가르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5분짜리 한 곡의 노래를 청중에게 전달하는 가수도 그 한 곡을 위해 셀 수 없는 시간을 연습과 연습을 통해 더 완벽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강해설교를 어렵게 만드는 전달자의 미숙함은 더 많은 기도와 끝없는 노력으로 평생토록 해결해 가야할 문제일 것입니다.

넷 째, 강해설교에 대한 생소함 때문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고든은 지난 25년간 들었던 설교 중 요점이 분명한 설교는 15%정도이고, 그 중 본문에 충실한 설교는 10% 미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오늘날 흔히 들을 수 있는 잘못된 설교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첫째로 도덕적으로 어떻게 살 것을 계몽하는 도덕주의 설교, 둘째로는 어떻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요령을 알려주는 설교, 세번째는 자기성찰을 강조하는 설교, 네번째는 사회적으로 뭔가 해야한다고 선동하는 설교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네 가지 부류의 설교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설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설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듣기 보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살면 복을 받고 어떻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지 듣기 원합니다. 사람들은 강단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꾸짖고 그것을 바로잡는 목소리를 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선포되는 것 보다 더 짜릿해 합니다. 더 열심히 잘 살아야한다, 힘내야 한다는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에 성경의 옷만 입히면 그 성경이 본래 말하는 의미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랜 잘못된 설교의 폐해입니다.

이런 형식의 설교를 오래 들어온 사람들에게 강해설교는 참 따분하고 지루한 설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힘나게 해주는 말들을 해주기를 기다리는데 계속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오늘 어떻게 살아야할지 빨리 듣기 원하는데,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찬양하는 말만 하는 것 같이 들릴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유머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적절히 섞여 흥미를 유발하기를 기대하지만 그러한 요소가 전혀 없는 설교를 들었을 때 너무 영적(?)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데이비드 고든이 들었던 80%의 설교를 25년이상 들어온 사람에게는 나머지 10% 미만의 강해설교를 듣는 것은 힘이 든 일입니다. 생소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강해설교가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마음 때문입니다
.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사랑의 편지를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편지를 읽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계속 읽어보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기 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마트폰의 새로운 기능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새로운 전자기기의 사용법을 알기 위해 설명서를 정독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본래 의미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때 포기하기 쉽습니다.

당신은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소망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어떤 분이신지 말씀을 통해 듣기 원하십니까? 그분이 이천년에 오셔서 어떤 마을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이루신 분인지 알기 원하십니까? 수천년전 그분에 대해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알기 원하십니까?

강해설교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오늘날 저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그렇게까지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교문을 들고 올라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짚어가며 그대로 읽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목소리 톤도 크게 다르지 않고 책 읽듯 설교문을 계속해서 읽어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청중은 그의 설교에 눈물로 회개를 하고, 그가 설명하는 놀라운 구세주의 영광을 찬송했으며, 하나님으로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설교자의 느린 말투, 변화가 거의 없는 어조, 힘 없는 목소리도(에드워즈가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하는 강력한 청중들의 마음이 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또한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이야기를 듣기 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말세의 강력한 쇠락의 물결에 휩쓸려 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세에 우리는 나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돈 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며, 나를 기쁘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것보다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설교를 즐거워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내 영혼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가 담긴 성경의 참 의미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또 그것을 듣고 소화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합니다.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난해한 부분도 있고, 성경을 둘러싼 문화와 역사의 이해가 필요한 경우도 있으며, 문맥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더 쉽고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은 청자의 몫입니다. 설교자와 청자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아는 일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부분에서 노력할 때 하나님의 진리가 교회 위에 굳건히 세워질 것이며 성도의 삶이 이 하나님의 진리가 가진 살아있고 확력있는 능력으로 거룩하게 자랄것이며,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세상에 선포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