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종종 성경해석에 있어서 어려움이 되는 부분을 어느 지점에서 다루어야 할까?
고민을 했었습니다. 비유나 예표, 묵시에 대한 해석이 그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잠시 쉬어가는 코너“예표”에 대한 해석을 다루기 원합니다.

예표는 영어로 TYPE이라고 합니다.
또 예표를 통해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을 “예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이라고 합니다.

예표에 대하여 넬슨 성경사전(Nelson’s New Illustrated Bible Dictionary)은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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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럭스바이블 소프트웨어에서 제공하는 성경사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내적 연관성을 예상하여,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서로 맞는지가 대조 비교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구약성서의 인물, 사물(things), 사건 중에, 신약성서의, 특히 예수 그리스도 및 그 교회에 대한약속 예언을 찾아 내는 일이다. 따라서 예형론적 해석은 비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과 접근하고, 종종 비유적인 수법을 대용(貸用)하게 되어, 양자는 엄밀히 구별하기 어렵다.

이해를 더 돕기 위해 그림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진 2015. 1. 19. 오전 1 01 43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어떤 분이세요?”

우리는 현재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단지 지식적인 활동이 아니라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활동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 할 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많이 알아가고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아 갑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성경을 문법적-역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진 2015. 1. 19. 오전 1 01 37

“옛날 소년 다윗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대항하는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바로 나다!
그게 바로 너와 지금 함께 하는 나란다.”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과거에 그의 백성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주목합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시대 배경에서 어떤 선택을 했으며, 어떤 어려움(골리앗)을 만나게 되었고,
그 때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서 사실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다윗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또 다윗의 하나님이 곧 오늘날 나의 하나님이신 것이죠.

그래서 문법적-역사적 해석은 기록된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충분히 설명하기 전에
성급히 오늘날로 적용 점을 끌어오지 않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그 역사적 사건 속에서 충분히 설명해야만
오늘날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명확하고 풍성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표를 살펴보겠습니다. 예표는 그림으로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진 2015. 1. 19. 오전 1 01 29

예형론적 해석은 구약성경의 역사적 사건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의 연관성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의 설명을 하지요.

“다윗은 믿는 성도를 모형으로 보여준다.”

“다윗이 고른 돌 다섯 개는 모세 오경(하나님의 말씀)을 예표 한다.”

“다윗이 무찌른 골리앗은 마귀를 상징한다.”

이런 예형론적 해석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 직접적인 의미를 가져다 주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디럭스바이블의 성경사전이 말하듯 “예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꼭 그렇게 봐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어떤 분들은 “이런 방법의 해석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문제는 신약 성경에는 실제로 예표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 4장 22~28절을 보십시오.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또한 멜기세댁(창 14:18~20; 시 110:4), 놋 뱀(민 21:4~9; 요 3:14~15), 성막(히 9~10장) 등도 신약성경에 기록된 분명한 예표입니다.

넬슨 성경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어떤 학자들은 신약성경에서 확실하게 예표로 인정한 부분들만 “확실한” 예표로 보고,
또 어떤 학자들은 예상 가능한 모든 연관성 있는 것들을 예표로 인정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에 속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예표라고 드러난 부분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사도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모든 구약성경과 예수님 사이에 연관성 있는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또한 사도들은 직접적인 계시를 받거나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신약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신약성경에 드러난 예표가 의심할 이유 없이 모두 “확실한” 예표인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진 성경이 그것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예상”된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근거로 만든 예형론적 해석은 누가 입증해줄 수 있을까요?

그것이 신약성경과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그 누가 확정 지을 수 있을까요?

만약 그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확실한” 예표라고 말할 수 있다면,
왜 학자마다 예표를 설명하는 방식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성령님은 그 모든 학자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표를 설명해주신 것일까요?
아니면 그 중 한 사람만 진짜일까요? 만약 한 사람만 진짜라면 그 누가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이유로 저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실성”이 보장된 예표만 인정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외에 우리가 “예상”한 예표들은 아무리 의미가 있더라도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때문에 신약성경으로 입증된 예표가 아닌 예표를 가지고 예형론적 해석을 만들 때에는

확실한 모형이다!
무엇을 예표한다!
이것을 상징한다!

라고 확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런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를 줄 수 있다.

라고 신약성경의 절대적 권위로 인정된 “확실한” 예표와
자신이 “예상”한 예표의 권위 차이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첫 째, 만약 내가 “예상”한 예표가 잘못된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 뿐만 아니라 잘못 전달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A라고 말씀하신 것을 B라고 전달하는 선지자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구약시대에 그것은 사형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능력있고 살아있는 말씀을 대하는 두려운 마음과 경외하는 태도는 여전히 필수적입니다.
때문에, “확실한” 예표가 아닌 “예상”한 예표에 대해서는 예상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저는 항상 말씀을 준비할 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을 명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1~2)

우리가 지금 누구의 말씀을 누구 앞에서 대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예상”한 예표를 “확실한” 예표처럼 말해서는 안됩니다.

둘 째, “예상”한 예표를 좇다 보면 정작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데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윗이 겪었던 사건을 조명하며 하나님이 그 사건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그려내기 보다는
모두가 아는 수준으로 사건을 그냥 훑고 지나가고, 성급히 예표를 “예상”하여 신약의 원리와 맞대응 시키고
적용 점으로 넘어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본래 기록된 “확실한” 사건은 시시콜콜한 다 아는 이야기처럼 일반적으로 다뤄지고,
반대로 “예상”된 예표의 의미는 새롭고 놀라우며 핵심적인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사진 2015. 1. 19. 오전 2 48 12

이 그림자를 보세요 얼마나 멋진가요?

셋 째, 사람들에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는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깊이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자신의 성경에 대한 무지함을 불필요하게 자책하거나
반대로 이러한 의미를 찾아낸 사람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저는 자책하는 성도들에게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성경학자들, 청교도들,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도 평생 성경을 연구했지만 이런 의미를 못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예표는 성경에 등장하는 것으로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설명을 들었던 사도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신약성경으로 입증 되었습니다.

이것이 “확실한” 예표입니다.

또한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신약과 연관되는 것들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이라는 경계선 안에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상”된 예표는 항상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하면서 “예상”된 예표를 “확실한” 예표처럼 설명하거나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첫 째,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거나
둘 째,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신약성서를 기록한 사도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계시를 기록한 것이거나
셋 째, 자신이 “예상”한 것이 다른 사람의 “예상”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맞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의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본인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경우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교리적인 문제를 발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직접적인 계시를 하시는가?

성령님은 신약의 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감동하심으로 계시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렇게 역사하시는가?

교리에 대한 부분을 여기서 다 다룰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위의 두 가지는 종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은 오늘날에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조명하시지만,
그것은 신약의 저자들에게 하신 방법과 달리
성경의 원래 기록된 의미 안에서 조명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표의 해석은 항상 조심스럽게 그리고 반드시
신약성경의 확실한 보증 아래 이루어져야 올바른 성경의 의미를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