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다 나은 기독교> 시리즈를 공부하면서
한 가지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것은,
교회는 성경을 앞세워 사람이 겪는 고통을 무시하고,
세상은 성경을 무시하지만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도 성경도 사람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고 그 가운데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길보다 하나님의 길이 더 나은 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낙태를 반대하는 이유도
낙태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겨서가 아닙니다.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것이 그 고통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규칙과 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며,
우리를 구속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기억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구속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죽기까지 내어주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고,
우리의 관심과 필요를 돌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현재 낙태는 미국에서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모든 임신 중 약 50%가 의도하지 않은 임신이고,
그 중 40%가 낙태로 종결된다고 합니다.
2011년 한 해에만 약 백만 명의 아이가 낙태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하루에 12만 오 천명의 아이가 낙태로 죽고 있고,
미국은 하루에 3000명이 죽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낙태가 불법인데도, 2010년의 기사에 따르면 1000명당 31명꼴로 낙태를 선택하고,
한 명의 아이가 태어날 때 2.5명의 아이가 낙태된다고 합니다.
일 년에 60만명이 태어나면, 150만명이 낙태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4000건, 20초당 1명의 아이가 낙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낙태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모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세 가지 예외를 두고 있습니다.

1. 임부 또는 배우자가 우생학적, 유전학적 장애나 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2. 강간이나 준강간으로 임신하였거나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친족 간 임신

3.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이러한 예외들은 산모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법적으로 한국은 태아와 사람을 구별하는데,
형법으로는 진통설을 채택하여 진통이 규칙적으로 있을 때,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
민법으로는 완전노출설이라 하여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점을
태아가 사람이 된 시점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법적인 구분은 낙태의 예외사항을 적용하는데 있어 도움을 줍니다.
또한 산모의 권리를 인정하는데 있어서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갖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아의 구분이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태아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8~12)

시편 139편에서는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라고 말합니다.

이미 태아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기록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성경 여러 구절에서 우리는 태아가 사람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욥 31:13~15; 사 49:1~5; 렘 1:4~5; 갈 1:15~16; 눅 1:41~45; 시 51:5)

또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로 태아와 어린 아이는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출 21:4 – 아이, 출 21:22 – 태아; 헬라어: 행 7:19, 눅 1:41, 44)

하나님의 말씀은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하십니다.

때문에,
낙태는 한국의 법률상 살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태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살인이며,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번성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은 낙태를 합법화 함으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 여성의 위치를 신장시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여성의 인권 보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낙태라는 죄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여성의 인권보호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준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말하는 기준을 택할 것인가?

극단적인 예들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발견합니다.

한국의 법률이 인정하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만약 아이가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 뻔한데,
산모와 가족에게, 또한 아이 본인에게 심각한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낙태가 더 합리적이고 그들의 행복을 보호하는 선택이 아닐까요?

혹은 강간으로 아이가 생긴 경우
아이를 보며 트라우마를 겪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그 아이를 지워, 고통을 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나은 결정이 아닐까요?

그것이 세상이 제공하는 산모를 위하는 길입니다.

사실 이러한 극단적인 예들 안에서 간과되는 것은 아이의 살 권리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는 누가 보호하는 것일까요?

만약 장애를 가지고 있는 태아나, 범죄로 생긴 태아가 죽어야 한다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장애 아이들과, 범죄 때문에 태어난 아이들은
사실상 죽어야만 했던 아이일까요?

산모가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나지 말아야 했을 아이들이었나요?

랜디 알콘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은 수 많은 돈을 들여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장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사용하고,
그들을 대우하고 보호하기 위해 수 많은 법률과 시스템을 구비하지만,
장애를 가진 태아를 가진 부모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아이를 사람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범죄로 인해 고통스러운 부모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사람들은 장애아를 죽이는 것이 산모의 고통을 줄인다고 오해합니다.
범죄로 생긴 태아를 죽이면 산모가 고통을 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를 죽이면 산모가 보호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죄는 언제나 고통을 배가시킵니다.

범죄로 인한 고통은 평생 잊기 힘든 큰 상처를 남기지만,
죄 없는 아이를 죽인 고통은 그 큰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남깁니다.

낙태를 경험한 산모들이 자기 혐오나 우울증을 앓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의 집회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부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 부부의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통해 말 할 수 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더 하셨습니다.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나 친척 모두의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죽였을 때, 부모는 더 많은 고통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산모의 참된 행복을 제시합니다.

극단적인 예시 속에서 세상은 피해자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감정을 고려합니다.
피해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결정을 인정합니다.
그에게 본인이 행복하면 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의 길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이 더 선한 길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분이, 어찌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어렵고 고통스러워 보여도,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낙태는 죄입니다.
죄의 결과는 언제나 죄를 지은 자를 찾아와 그 결과를 맛보게 합니다.

당장의 감정적, 정신적 고통의 해소를 위해 죄를 선택한다면,
결국 그 죄의 대가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관점을 가지고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장에는 자신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권면이 더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결정입니다. 내 생각과 내 기준이 판단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바로 삼키기에는 쓰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습니다!

낙태의 문제로 고민 중인 사람에게 우리는 성경의 기준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예에서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
혹은 여러 다른 문제로 낙태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그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하면서 위로해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혼란 가운데, 고통 가운데
더 고통스러운 길을 택하지 않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이미 낙태를 한 경우 역시 회개의 길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생명을 죽인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에게 줄 수 있는 참된 위로이며,
진정으로 회복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