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맥아더 목사님이 2021년 5월 16일 “Providing Shade for Our Children, Part 3″라는 제목으로 여러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내용입니다. 자녀 양육에 정말 유익한 말씀으로 유평교회 라기태 형제님께서 번역으로 수고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계속해서 자녀 양육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일련의 설교에 ‘자녀를 위한 그늘’이라는 제목을 붙이거나, ‘자녀를 두고 벌이는 전쟁’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뤄 온 내용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는 여러분 모두에게 명확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간단히 되짚어 보면, 자녀를 두고 벌이는 전쟁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가장 무방비한 존재들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속이기가 가장 쉽고, 파괴하기도 가장 쉽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세울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귀한 성품과 덕을 본으로 보여주거나, 아니면 방탕하고 타락한 삶, 사악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나쁜 본보기를 보여줄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이 미치는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회 속에 있는 모든 악은 궁극적으로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줍니다. 성경이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문화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존재는 우리의 자녀입니다. 그들은 부모만큼 악하게 되거나, 혹은 부모보다 더 악해집니다. 그다음 세대는 전 세대보다 더 악해지고, 또 그다음 세대는 그 전 세대보다 더 악해지는 것이죠. 이 악순환을 되돌리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걸립니다. 아예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명심해야 할 것, 그리고 믿는 사람들로서 단호히 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태중에 들어설 때부터 전쟁을 치릅니다. 시편 기자가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씀은 아이에게 죄성은 잉태될 때부터 현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은 죄인으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그 죄를 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철이 없습니다. 잠언에서 사용한 표현들을 빌리자면, 아이들은 지혜가 부족하고, 판단력이 부족하고, 슬기롭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타락한 본질, 자신의 무지, 부족한 지혜에 더해 그들의 부모가 만든, 혹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만든 집단 문화를 물려받습니다. 이러한 집단 문화만 물려받는 게 아니라, 부모의 실패라는 엄청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즉, 사랑의 결핍, 이혼, 깨어진 가정, 그 밖의 온갖 형태의 죄 말입니다. 어른들에게는 자녀가 주님을 경외하도록 양육하거나 혹은 그들을 파괴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습니다. 어른들은 항상 아이들을 파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읽었던 에스겔 1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이 제물로 바치던 아이들에 대해 “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절)고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시며 그들 위에 안수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부모는 청지기입니다. 비극적이게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청지기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수행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인 우리에게는 의를 다음 세대에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여러분이 기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초는 바로 결혼과 자녀와 부모 역할 모두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에베소서 6장으로 이끕니다. 성경을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6장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조금 전 신명기 6장에서 읽었던 부모의 책임을 신약에서 확증해 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의 순종, 즉,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칠 때 지켜야 할 두 가지를 가르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순종과 공경입니다. 공경 없는 순종은 쓴 마음에서 나온 억지 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경에서 나온 순종은 존중과 자발적인 마음이 담긴 순종입니다.
구약으로 가서,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신명기 6장을 오늘 아침 간단히 상기시켜 드리려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어디에서든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과 삶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도 이를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목표는 자녀가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양육할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6장 4절이 그 방법을 말해 줍니다. 여기 사용된 “아버지들아”라는 단어는 헬라어 파테라(patera)인데, 일반적으로는 “아버지들(fathers)”로 번역되지만, “부모(parents)”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은 모세의 부모가 그에게 베푼 보살핌을 언급하며 이 단어를 “부모”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아버지들”을 지칭하지만, 동시에부모의 책임 전반을 포괄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법입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짧은 한 문장 안에 부모의 책임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진리와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 그리하면, 복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훈련하십시오. 그러면 에베소서 6장 3절에 언급되고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반복되는 풍성한 삶과 이 땅에서의 장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이뤄질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신다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법을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와 같이, 여러분은 그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가르쳐야 합니다. 진리(교훈)와 훈계는 복 받는 경건한 자녀 세대를 양육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를 되풀이하고 그다음 세대에 물려줄 그런 세대를 끊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을까요? 4절을 조금 더 자세히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들아,” 이 구절은 이렇게 아버지들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아버지들”이라는 표현은 부모 전체를 가리키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이 책임의 주도자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가정의 남성 가장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부모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양육의 책임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며, 그리스도께서 남자의 머리이심과 같이 남자는 여자의 머리입니다. 잠언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즉, 자녀를 가르치는 주체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살며 글을 쓰던 세상은 아동 학대가 지극히 정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세상이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로마법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 즉 “아버지의 권한”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자녀가 사는 동안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기분이나 결정에 따라 자녀를 벌하거나, 심지어 죽일 권리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아버지 앞에 놓였는데, 아버지가 아이를 살리기 원하면 그를 들어 올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버리면, 아이는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아버지가 원치 않는 아이들은 로마 포룸(Roman Forum)에 버려졌고, 이들을 노예로 키우거나 이들로 로마의 창녀촌을 채우기 위한 자들이 이들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과 같이 세네카(Seneca)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나운 소는 도살하고, 미친개는 목을 졸라 죽이며, 병든 가축은 칼로 찔러 죽인다. … 약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물에 빠뜨려 죽인다.” 아동 학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흔했고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잔혹했습니다. 오늘날처럼 태중에서 아이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이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살펴보되 먼저 4절에 있는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이와 매우 유사한 말씀이 병행 구절이라 할 수 있는 골로새서 3장에도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1절: “너희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라” 혹은 “화나게 하지 말라.” 노엽게 하다, 화나게 하다, 격노하게 하다, 이 말들은 실제로 동의어입니다. 단순히 “아이들을 화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사용된 말은 강한 표현입니다. 원어에서 이 말 앞에는 전치사[접두사]가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의 뜻은 “화를 내다”인데, 전치사[접두사]를 더하면 그 뜻은 강렬한 분노가 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간단한 명령입니다. 자녀를 화나게 할 일을 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아이와의 관계를 파괴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녀를 화나게 할까요? 사실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십니다. 아마도 뭘 해야 자녀가 화를 내는지 정확히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아이의 화를 유발했다는 것이 아이에게 메시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겨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냐고요? 다음과 같이 하면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를 과도히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울타리 안에 가두고, 믿어주지 않으며, 자유를 주지 않고, 틀 안에서 죄고, 끝없는 규칙들을 만들어 아이가 또래 친구들보다 더 얽매여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결코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여유와 자유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어느 정도의 자유를 사용하면서 책임감을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분노하게 하고 격분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편애입니다. 편애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네가 네 누나만큼 잘했으면 좋겠구나.” 이런 말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부모의 사랑이 이류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전과는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아이들을 서로 비교하지 마십시오. 각각의 아이는 고유한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각자 온전한 사랑을 받아야 하고, 다른 형제자매와 비교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실질적인 예를 들자면, 자녀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문화 속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A나 A+를 받아오라고 강요하고, 그보다 낮은 점수를 받아오면 반드시 고통을 겪게 만드는 식이죠. 대부분 이런 행동은 부모 자신의 자랑을 위한 것입니다. 자랑은 죄입니다. 유전적으로 말해, 자녀가 여러분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분명한 점은, 당신의 야망이나 자존심의 무게로 자녀를 으깨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살을 시도해 UCLA의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한 소녀를 방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토미 조였고, 저는 그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교회에 다녔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저를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소녀를 스스로에게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해 벽면에 환자 보호용 패드를 댄 방에 가두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끈질기게 요청했고, 결국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당신들은 그녀를 패드를 댄 방에 가둔 것 외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잖아요. 제가 무슨 해를 더 끼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저를 들여보냈습니다. 저는 소녀가 정신과 의사 앞에서 둘러 대던 온갖 겉치레를 넘어선 후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네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니? 나에게 이야기해 보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뭘 하든 그게 엄마 아빠에겐 절대 충분하지 않아요.” 자녀들은 엄마와 아빠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들이라고 느껴야 합니다. 비현실적인 기대는 자녀가 스스로를 실패자로 느끼게 만듭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거절당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청소년 자살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자녀를 낙담시키는 것입니다. “넌 절대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거야.” 부정적인 강화죠. 고마워하지도, 상을 주지도, 인정해 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녀를 칭찬하는 건 뭔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는 거죠. 이것이 자녀에게 주는 메시지는 “너는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어. 너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어. 너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대로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이기심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결코 자신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집을 떠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서도 부모는 자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곧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녀가 원하거나 갈망하거나 즐거워하는 어떤 것에 대해, 부모가 결코 희생하지 않는다면, 자녀는 점점 쓴 마음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모는 자녀의 바람을 막는 적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아이는 자신이 부모의 삶에 끼어들어 방해가 되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녀는 부모를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마른 태도입니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 태도, 이를테면, 물건을 쏟거나 부수고, 엉뚱한 말을 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나 허황된 바람을 말하는 것 등에 대해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을 꾸짖지 마십시오. 아이들에게 어른과 같은 사고방식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생각이라는 걸 하는 것만으로도 칭찬하십시오. 그러면 희망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무관심한 것 또한 자녀를 노엽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실패하는 것을 말합니다. 절대로 자녀와 거리 두는 것을 벌을 주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이를 벌주는 가장 나쁜 방법은 아이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라는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감옥 같은 곳에 홀로 앉아 부모의 사랑과 애정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곱씹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화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언어적 학대입니다. 아이들은 어휘가 매우 제한적이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어휘 중에는 아이 앞에선 절대 내뱉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저는 욕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아이들에겐 없는 언어의 힘이 있습니다. 어른의 어휘는 아이의 것보다 훨씬 방대합니다. 당신은 빈정거림으로 아이를 짓누를 수 있습니다. 조롱과 날카로운 말로 아이를 으깰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매우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런 일들을 하지 않도록 내 삶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부모 역할의 대부분은 어떻게 보면 사전 계획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요? 무언가 철저히 계획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부는 계획되어 일어나고, 또 계획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가령 주님의 가르침은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그때그때 벌어지는 일들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따라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아이를 비난 속에서 살게 하면, 그는 남을 비난하는 법을 배웁니다. 아이를 적대감 속에서 살게 하면, 그는 싸우게 됩니다. 아이를 조롱 속에서 살게 하면, 그는 수줍음을 배웁니다. 아이를 수치심 속에서 살게 하면, 그는 죄책감을 느끼며 삽니다.
아이가 관용 속에 살면, 그는 인내하는 법을 배웁니다. 격려 속에 살면, 자신감을 배웁니다. 칭찬 속에 살면,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공정함 속에 살면, 정의를 배웁니다. 안정감 속에 살면, 신뢰하는 법을 배웁니다. 인정 속에 살면, 자기 안의 가치를 보게 됩니다.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부모와 살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계획한 어떤 것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삶이 흘러가면서 마주치는 순간들 속에서 전달됩니다. 그러니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사랑으로 돌보십시오. 지금까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럼 이제 에베소서 6장 4절에 나오는 ‘해야 할 것’에 관한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훈(Discipline)”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aideia(파이데이아)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를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징계(chastening)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자녀를 훈련한다는 것은 상벌이 동반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아이를 양육하는 데는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반복적으로 진리를 가르치고, 생각하는 법, 말하는 법, 행동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죠.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은 상과 벌을 통해 강화되어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상과 벌은 결코 사랑 자체를 주거나 뺏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단한 명령은“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입니다. 잘못된 사고, 잘못된 말, 잘못된 행동에는 고통이 따르게 하십시오. 이것이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입니다.
“훈계(Instruction)”라는 단어, 곧 헬라어 누데시아(nouthesia)는 “경고를 수반한 언어적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교훈과 훈계)는 그렇게까지 다른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상벌을 사용해 아이를 훈련하고, 또 말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훈(Discipline)은 부모가 아이에게 행하는 것이고, 훈계(Instruction)는 부모가 아이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 안에서”라는 부분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이것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을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 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를 존중하고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조금 전 읽었던 신명기 6장으로 잠깐 돌아가 4절 말씀을 간단히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가르치십시오.
신명기 6장 5절은 자녀들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자녀에게 부모를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 순종이 우리 자녀들이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며, 자녀가 축복받는 위치에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6절에서는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녀들을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7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부모는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입니다. 삶의 모든 것이 자녀들에게 그들이 사랑하고 순종해야 할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가르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나서 성경은 곳곳에 “손목에 매는 기호” 혹은 “미간에 붙인 표”와 같은 기억 나게 할 표징을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는 자녀들에게 오직 사랑하고 순종해야 할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10절 [11,12절]에서는 자녀에게 세상에 대해 경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라.” 여러분은 항상 세상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여러분이 자녀에게 하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계십니까? 세상은 여러분의 친구가 아닙니다. 세상은 적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집요한 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디모데후서를 잠시 살펴보시죠.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이 가르침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디모데후서 3장 15절을 보시면, 바울은 디모데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바로 여기입니다. 디모데의 경우, 그 가르침은 신실한 부모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1장 5절에서 신실한 어머니와 할머니를 언급하며, 이들이 디모데에게 어릴 적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전하는 성경을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다른 사람과의 화평도 파괴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 영원한 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용서를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복음대로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복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가르치십시오. 자녀에게 회개를 가르치십시오. 자녀가 회개하도록 가르치십시오. “그건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고 징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회개하도록 가르치십시오. 하나님께 불경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부하도록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 바로 지상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지상 명령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구세주로 신뢰하도록 가르치십시오. 예수님을 순종하며 따르도록 가르치십시오. 여기에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잠언은 이러한 가르침을 위한 매뉴얼입니다. 잠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언이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잠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라.” 청년에게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잠언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자녀에게 전해집니다.
잠언 2장 1절: “내 아들아, 나의 말을 받으며…,” 3장 1절: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4장 1절: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어 굳게 지키라 하셨느니라.” 4장 10절: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20절: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5장 1절[2절]: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6장 1절: “내 아들아…” 이러한 말씀이 계속 반복됩니다. 6장 20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이 구절은 신명기 6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7장 1절: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24절: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듣고…” 8장 32절: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그리고 8장은 실제로 ‘지혜’가 외치는 것인데 36절에서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지혜-를 거슬러 죄를 짓는 자는[나를 잃는 자는] 자신을 [자기의 영혼을] 해치며,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지혜를 거부하는 데에는 큰 대가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부모의 과업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어리석고 철이 없어, 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들은 총명이 어두운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동일한 4장에서는 그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무지 가운데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잠언 22장 15절에서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느니라.” 잠언 12장 15절은 말씀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옳게 여기나….” 이와 같이 아이는 스스로를 옳다고 여길 수 있으나 실상은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구원받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지혜의 근원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으로 시작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신령한 지혜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고린도전서 2장 16절)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 열심을 다해 Generations of Grace(은혜의 세대)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에게 다른 프로그램과 견줄 수 없는 교육을 제공하고, 주일 저녁에는 Adventure Club(모험클럽)을 통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비길 데 없는 커리큘럼들이죠.
이제 오늘 아침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서 설교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아직 가방을 싸진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 특히 잠언의 서두에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교훈들이 나옵니다. 이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열 개 가량의 교훈들 중 오늘 아침에는 두 가지만 다루고자 합니다. 다시 잠언 1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죠.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모든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와 비슷한 선언이 잠언 9장 10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근본]이요…” 모든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잠언을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장수할 것이며, 복을 받고, 풍성한 삶을 누리며, 악에서 자유로울 것 등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약속입니다. 그들은 장수하고, 복을 받되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부를 넘어서는 복을 받고, 풍성한 삶을 누리며, 악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잠언 3장 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일어나는 일이 바로 악에서 돌이켜 여호와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만족스런 잠을 자고, 악을 피하며, 미래에 대한 확신을 즐기고, 칭찬을 받으며, 기도 응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복의 근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누가복음 12장 본문입니다. 익숙한 본문이지만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읽어 드리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을 접할 때 여러분이 보통 어떤 것을 떠올릴지 저는 모릅니다만, 누가복음 12장이야말로 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를 논할 수 있는 좋은 본문이라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2장5절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누구를 두려워하라고요? 사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여러분은 무언가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모르실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참새가 팔리는 것도 아십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은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가장 작고 사소한 현실까지도 주권적으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할 곳은 없습니다. 영원한 형벌은 아이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리이며, 아이들은 지옥에 던질 권세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깨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8절에 보시면, 여기 해결책이 제시됩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그분의 주권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시인하십시오. 그래야 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말씀을 나눌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그 경외함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이제 잠언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두 번째 교훈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진리를 말하라. 진실을 말하라. 이것은 잠언에서 지혜와 관련하여 다루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잠언 4장 24절: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우리는 모두 우리의 타락한 마음과 부패한 마음이 가장 쉽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입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잠언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잠언 5장 1절[2절]: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네 입을 지켜라. 네 말을 지켜라. 진실을 말하라. 잠언 6장12절에서는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라고 말씀하고, 잠언 10장 11절에서는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13절에는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라는 말씀이 있고, 14절에는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자는 계속해서 이 주제에 대해 더 많은 말씀을 나눕니다. 18절: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 19절: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20절: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21절: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31절까지 내려가서 보시면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32절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주목해 들으십시오. 잠언은 의인의 입술은 진리를 말하고, 지혜를 말한다고 합니다. 의인의 입술, 의인의 말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 말은 생명의 샘이고 생명나무입니다. 그 말은 순은 같고, 듣는 자가 양식으로 삼을 만큼 만족스러우며,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진실하고, 오래 참고, 친절하고, 지혜로우며, 정직하고, 순결하며, 부드럽고, 온유하며, 노하기를 더디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술은 주님을 나타내는 입술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의 입은 비뚤어진 말, 우매함, 폭력, 미움, 악의, 쓸데없이 많은 말, 다툼, 파멸, 중상모략, 폄하, 험담, 치욕, 맹렬한 불, 해악, 패역함을 쏟아냅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자들 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시편 58편 3절을 들어보십시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제가 안 했어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거짓말인 것을 압니다. 그 아이가 한 일을 알기 때문이지요. 거짓이 아이들의 본성인 이유는 그들이 어둠의 왕국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마귀이며,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잘 알고 계실 잠언 6장 16절-1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이 일곱 가지 가운데 유일하게 반복되어 언급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합니다. 그분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입술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특히, 매우 흥미롭게도, 잠언 29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만약 거짓말쟁이가 지도자라면 정직한 사람들은 다 그를 떠나게 되고, 결국 그의 곁에는 거짓말쟁이들만 남게 됩니다. 잠언 13장 5절은 이렇게 되는 이유가 의인이 거짓말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잠언 17장 7절은 한술 더 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지도자[존귀한 자]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지도자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악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잠언 26장 28절: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사람들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악용하려는 것이며, 당신을 무너뜨리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강하게 보여주는 예가 예레미야 5장에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 유수 전 유다에서 바벨론의 침략, 예루살렘의 멸망, 유대인들의 바벨론 유수를 반복적으로 예언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예언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까지 살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예레미야 5장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막 바벨론 유수, 곧 바벨론이라는 살육의 기계를 보내어 커다란 심판을 내리시며 유다 백성을 도륙하시려는 참입니다. 그런데 “내가 찾기를 원하는 것은 진실한 한 사람, 단 한 사람이 전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오셔서 보소서.” 3절: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오셔서 보소서.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토록 은혜를 베푸셨으며, 거듭거듭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단 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말쟁이라면 어떤 범죄든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정말 어떤 범죄든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범죄를 은폐하는 데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은폐하는 것이 그의 업입니다. 반면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절제할 줄 압니다. 그는 진리에 매여 있고 진리는 그를 죄를 짓지 않도록 잡아줍니다. 그는 거짓에 취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거짓말쟁이라면 당신에겐 그런 억제력이 없기 때문에 짓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훈련을 강하게 시키십시오. 왜냐하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 진실해야 한다는 책임감 자체가 그들을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들에겐 죄를 짓고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질적인 것이 되는데, 이는 이들이 진실을 말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사람은 거짓말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갖고 있습니다. 강한 거부감을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거짓말쟁이는 어떤 범죄든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2절에서와 같이, 백성들이 그들의 약속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2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곤 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컨대,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 맹세해.” 와 같은 식이죠. 그런데 “실상은 거짓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맹세에 불충했던 이유는 그들이 훈련된 거짓말쟁이였기 때문입니다.
4절: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5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6절]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본즉 그리고 나오는 자마다 찟기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함이니이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겐 거짓을 말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 할 것입니다. 자신의 맹세에 신실하지 않고, 하나님께도 신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압니다. 여호와의 길을 적어도 역사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늘 어깁니다. 그들은 배우자에게도 불충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8절]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도다.” 거짓말하는 자는 배우자에게도 신실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어떤 곳도, 어떤 것도 더럽힙니다.
10절: “너희는 그 포도나무 줄기들을 타고 올라가서[그 성벽에 올라가] 무너뜨리되 다 무너뜨리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 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 [11절]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게 심히 반역하였느니라.” 그들은 여호와에 대해 거짓을 말하며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노골적으로 부인합니다. 그들이 받은 복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거짓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합니다.
내려가서 19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냐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 “너희들이 포로가 되는 것은 내게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불충의 주된 특징이 끊임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다시 내려가서 2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26절]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7절]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거짓말하는 지도자들은 가능한 모든 악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태의 악에 탁월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것을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도 거짓말, 저기도 거짓말, 모든 것이 거짓말입니다. 자녀들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가르치십시오.
예레미야 7장 8절: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이것이 7장 8절 말씀입니다. 9장에서 예레미야는 울며 호소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내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이 땅에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약 자녀가 거짓말을 편히 한다면, 그 자녀가 저지르지 못할 범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을 신중히 하도록 가르치십시오. 여기까지 두 가지 교훈을 먼저 살펴봤습니다. 이후에 더 많은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렇게 명확하고 실질적이며 도움이 되는 교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섬김에 있어 부모로서, 확대 가족으로서 이 교훈을 충실히 따르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데 신실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도록 가르치며, 믿음으로 나아가게 가르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며, 무엇보다도 부모를 공경하고 주님의 말씀에 명령된 모든 것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는 개인적인 삶에서도 가정에서도 신실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자녀들을 적의 손에서 구할 수 있는 넉넉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적은 너무나 끈질기게 자녀들에게 다가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모든 미디어 경로를 통해, 학교 교사들을 통해, 그리고 모든 곳에 퍼져 있는 문화의 영향력을 통해 자녀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아이들을 파괴하려는 세상과 싸워 그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여기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다른 많은 곳에도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