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창세기 1장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요한복음 1장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하나님의 입 기운은 실재에 담겨 만물을 무에서 만들어냈고, 그 말씀에 따라 창조된 모든 피조물 중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많이 담아냈다. 하지만 참으로 괘씸하게도 하나님 말씀은 바로 그 사람에 의해 무시당하고 거부당했다. 피조세계는 다시금 영적인 공허와 혼돈, 흑암 가운데 빠져버렸고, 바로 그때 육신이 되신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찾아와 각 사람을 비추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육신이 되신 하나님은 그저 닮은 수준이 아니라 본체 하나님의 형상이신 분으로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을 통하여 초자연적 신성과 능력을 만물에 담아내셨다.
그리고 요한일서 1장은 마지막으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한다. 먼저, 이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그리고 이 말씀은 만물과 각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러니까, 만물이 하나도 이 말씀으로 지음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요 1:3) 또한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다시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요 1:4;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누구든지 이 말씀을 들으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일 1:2). 그래서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경험자의 관점에서 증언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봤고 귀로 들었고 수년간 따라다니면서 자세히 관찰했으며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너희” 곧 요한일서 서신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그 말씀과 더불어 사귐을 누리자고 요청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한때 육신이 되어 그들 가운에 나타나신 분은 오늘 우리 앞에 안 계시지 않은가?
1. 충만한 기쁨의 사귐
요한은 매우 확신했다. 그들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 곧 기록된 말씀이 전달될 때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의 사귐이 주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요한은 지금 누구와의 사귐을 말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한 자신들과 증언으로 간접 경험한 독자와의 친교를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보고 들은 “우리”와 전해 들은 “너희”의 사귐은 매우 제한적이고 연약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귐은 단지 공통 관심사를 공유한 사람들의 사귐이 아니다. 숭배하는 대상이 같은 종교인의 교제가 아니다. 취향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 주고받는 친교가 아니다. 이들은 무려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을 누린다. 예수님은 영생에 관하여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요 17:3).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곧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시라고 했다(요일 1:2). 그러면 영생은 사귐인가(아는 것) 아니면 사람인가(예수님)? 둘 다 맞다. 예수께서 바로 만물과 사람에게 생명 그리고 새 생명을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시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을 아는 자,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믿음으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귐을 누리는 자는 그분께 속한 영원한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우리도 영생이신 분과 사귈 수 있는가? 그렇다. 직접 경험한 이들이 전해준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 요한은 그래서 이 편지를 썼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의 사귐을 누렸던 그들이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 생명의 말씀 덕분에 우리도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베드로는 그래서 신자가 거듭난 것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벧전 1:23).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들어야 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했다(롬 10:17). 여기 분명한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있다. 그분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들을 말씀과 경험한 것들을 생각해 내어 기록하도록 영감으로 이끄시고(요 16:13), 또한 그 기록된 말씀을 듣는 모든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증언하신다(요 15:26).
예수를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예수를 기뻐할 수 있는가?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벧전 1:8-9).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증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고 듣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담아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담길 때, 우리 영혼에 믿음의 씨앗이 심기고 자라고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생명을 낳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귐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요 15:7).
2. 말씀을 닮는 사귐
사랑하는 사람과 건강한 사귐을 가지려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된다. 반대로 좋아하는 것을 웬만해선 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반복해서 하면, 사귐은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같은 논리로 요한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5-7)
먼저 요한은 우리와 사귐을 갖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한다. 그분은 “빛이시”다. 요한의 이 설명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다. 참빛이신 예수님”에게서 듣고” “전하는 소식”이기 때문이다(요일 1:5). 요한은 그분이 “빛”이실 뿐만 아니라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하심’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어둠은 빛을 피한다. 둘이 섞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불의한 일을 즐겨서는 안 된다: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빛과 사귐을 갖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요일 1:7). 진리를 말하고 살아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서로 사귐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일 1:7). 그리고 그렇게 사귐을 누리는 자에게 이런 약속이 주어졌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잠깐, 우리는 모든 죄에서 단번에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 ‘깨끗하게 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는 현재형이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킨다(구분하자면 칭의가 아니라 성화다). 하나님은 진리를 행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자들을 하나님을 닮도록 거룩하게 빚으신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빛으로 그들을 밝히시는 것이다. 그렇다. 영원한 생명이신 말씀과의 사귐은 그 말씀을 닮아가는 사귐이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 닮아가도록 만든다.
3. 말씀을 담는 사귐
사귐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다. 혼자 사귀는 사람은 없다.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에서 하나님 쪽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변함없이 거룩하시며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쪽이 문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어둠에 맞서 싸우고 진리를 행하려고 애쓰지만 넘어지기 쉬운 존재다. 범죄하기 쉬운 연약한 존재다. 빛과 사귐이 있으면서 어둠 가운데 행할 때가 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우리 쪽에서 반드시 망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이 그 문제까지 해결하셨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일 1:8-10)
죄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건 스스로 속이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파렴치한 일이다. 이렇게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가리켜 요한은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 또는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말씀이 하나님의 기준 곧 죄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밝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은 그 말씀 밖으로 자신이 나갔을 때 양심이 즉시 알람을 울린다: ‘너는 지금 범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한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자백”이라는 놀라운 은혜의 방편을 주셨다. 죄를 부정하는 자의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반대로 죄를 인정하는 자의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찾을 수 있다. 자백하는 자는 그 말씀의 기준으로 자신을 정직하게 진단한다. 하나님 말씀의 판단 기준 앞에 굴복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상한 심령을 가지고 솔직하게 죄를 고백한다. 그러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신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사하다’와 ‘깨끗하게 하다’의 동사 형태는 부정과거다. 하나님께서 매우 신속하게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용서는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의로운 자로 변함없이 제한 없이 받아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도 말씀을 담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을 담아내는 사람만이 그 말씀에 비춰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우리는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 요한일서 1장에 언급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봤다.
1) 태초에 말씀으로 만물에 그 신성과 능력을 담아내신 하나님
2)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나타내신 예수님
3) 예수님에 관한 기록된 말씀을 믿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사귐을 누리는 우리
수면 위에 운행하신 성령께서 만물을 창조하는 능력을 더하셨고, 예수님 위에 임하신 성령께서 만물을 구원하는 능력을 더하셨으며, 사도들을 영감으로 이끄시고 택하진 자들 안에 말씀의 씨앗을 담아 생명을 낳는 성령께서 말씀을 기록하고 조명하며 능력 있게 사용하신다.
이 칼럼 시리즈의 목적은 우리가 늘 대하는(혹은 읽어야 한다고 압박을 느끼는) 성경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또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이와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하기 싫은 읽기 숙제를 억지로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해야 할 목록을 살피거나, 하지 말아야 할 규칙을 숙지하려고 성경을 자주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공간에 빛과 생명의 실체를 담아낸 것처럼 우리의 성경 읽기는 우리 삶에 그분의 영광을 담아낸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으로 어두운 영혼에 밝은 빛을 비춘 것처럼 우리의 성경 읽기는 우리 영혼을 밝게 빛나게 하고 거룩하게 빚어간다. 우리 죄를 자백하게 하고 하나님과 변함없는 사귐을 누리게 한다. 우리의 성경 읽기는 기록된 정보를 단순히 우리 머릿속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을 담아내는 것이고 또 이를 통해 말씀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고 풍성한 은혜의 방편인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