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1-4)
설교자가 전파해야 할 “말씀”의 내용은 세대 별로 달라질 게 전혀 없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 어떤 문화와 배경 속에 있든지 그들을 가르쳐야 할 내용은 우리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28:19-20).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진리보다는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청중 앞에서도 설교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따라야 할 설교자의 사명이다(딤후 4:1-4). 그러므로 “다음 세대를 위한 설교의 과제”는 단지 다음 세대만을 위한 과제가 아니라 지금 세대를 위한 과제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선포하는 모든 “설교의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제목을 “다음 세대를 위한 설교의 과제”로 삼은 것은 다음 세대의 상황을 충분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설교의 핵심이 ‘이중 귀 기울임’이라고 했다. 한 쪽 귀로는 본문(Text)이 말하는 것을 잘 듣고, 다른 한 쪽 귀로는 청중의 상황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항상 말씀을 선포하라고 엄히 명령할 때, 우리는 설교의 중요한 이중 경청을 발견할 수 있다. 설교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발견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설교자는 청중의 상황에 따라 경책하거나 경계하고 때로는 권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다음 세대를 위한 설교의 과제”는 이중 귀 기울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앞서 간략하게 우리가 논의할 ‘설교’란 무엇인지 정의하기 원한다. 해돈 W. 로빈슨의 <강해설교>는 설교 관련 추천도서에 항상 언급되는 교재이다. 로빈슨은 그 책에서 설교(강해설교)를 이렇게 정의했다:
강해 설교란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회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CLC, 2008, 23p).
이 정의는 1) 설교의 내용이 성경 본문이 의도한 개념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2) 또한 그 개념을 전달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생각으로 권위 있게 하도록 요구한다. 3) 마지막으로, 적용은 먼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그리고서 설교자를 통하여 회중들에게로 넘어간다. 연구, 발굴(해석), 전달, 적용 이 모든 과정을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신다는 사실도 이 정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면 설교의 내용과 전달, 적용에 있어서 다음 세대를 위한 설교의 과제는 무엇일까?
1. 설교의 내용: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인가?
다음 세대는 팩트를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엔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지만, 지금은 몇 번의 터치만으로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과거에 비해 많은 의견과 견해를 빠른 시간 안에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충분한 근거 없이 무언가를 주장하면, 젊은 세대는 몇 번의 검색으로 쉽게 그 의견을 무시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설교자에게 하나의 중대한 과제를 안겨 준다. 우리는 청중이 여러 매체를 통하여 본문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항상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왜 우리가 전달하는 본문의 의미가 진짜 성경이 말하는 의미가 맞는지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세대 청중을 베뢰아 사람처럼 여겨라. 베뢰아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도록 훈련하라. 그들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선포된 설교를 듣고 나서도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설교자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설교자의 직분이나 경력, 인기 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 자체의 명확성에서 온다. 과연 설교자가 전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생각이 맞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본문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경이 과연 그러한지 확신할 수 있는가?
해돈 로빈슨은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이런 표현이 너무 인위적이고 영적이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성경 본문을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배경지식을 참고하여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행위는 기계적이고, 단순히 말씀을 조용히 읽으면서 계속해서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이 그 의미를 떠오르게 하시는 것이 더 고차원적인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베네딕트회 수사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렉티오 디비나’라는 성경 읽기 방식이다(‘거룩한 독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9가지 표지 시리즈 중 <강해 설교>를 저술한 데이비드 헬름은 이런 성경 읽기 방식이 “체계적이며 이성적인 탐구보다 기분과 정서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부흥과개혁사, 2015, 36p). 그는 강해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런 성경 해석 방식은 “완전히 주관적”이라고 판단했다. 하나님 말씀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한 고민과 노력을 중단하면, 결국 우리가 최종 권위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을 말씀의 의미로 전달하기 쉽다는 말이다.
사실, 로빈슨이 말한 역사적-문법적 해석 방법(historical-grammatical interpretation)은 성경이 어떤 식으로 기록되었는지 생각할 때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당한 방식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벧후 1:21). 그런데 성령이 성경을 기록하신 방식인 ‘영감’은 저자의 생각과 배경을 완전히 무시한 채 기계처럼 받아적게 하신 방식이 아니다(기계적 영감설). 혹은 그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시고 각각의 사고와 재능의 한계와 오류를 모두 담아낸 문학 작품을 써내게 하신 것도 아니다(동력적 영감설). 성경이 오류가 전혀 없는 절대 권위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사람은 단지 인간적인 책으로 쓰였다고 보는 영감설을 지지할 수 없다(자연영감설).
우리가 지지하는(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성령께서 인간 저자의 생각과 지혜와 상황과 배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생각을 한 치의 오류 없이 기록하셨다는 것이다(유기적 영감설). 그렇다면 성경을 해석할 때도, 성령께서 반영하신, 저자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저자가 사용한 문자와 문법, 저자가 믿고 있는 신학을 충분히 연구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옳다.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밝히 깨닫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생각을 알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구해야 한다(“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동시에 설교자는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본문을 둘러싼 여러 가지 배경지식을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해야 한다(스 7:10; 벧전 1:10).
하나님은 지구상에서 단 한 사람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신 적이 없다(어리석게도 가톨릭은 교황에게 그 권한을 부여한다). 거듭난 신자는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나 지혜가 풍성한 자만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렵게 성경을 기록하지 않으셨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성경을 읽을 때, 그 속에서 하나님 뜻을 옳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물론, “어려운 것이 더러 있”는 것은 사실이다(벧후 3:16).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부지런히 연구하여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다음 세대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다’라는 선포와 함께 ‘왜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에 관한 설명이 충분히 전달되어야 한다. 그들은 쉽게 ‘다른 복음’, ‘다른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모든 것에 귀를 막고 눈을 감으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분별력을 키워줘야 한다. 그러려면 청자가 ’성경이 과연 그렇구나’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화려한 언변이나 수사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 배경 안에서 본문의 의미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개인적인 묵상과 성경 읽기, 본문 도해 및 연구와 함께, 건전하고 신뢰할 만한 참고 자료를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성경 사전, 배경 주석, 성경책별 주석 등). ‘이것이 본문을 기록하실 때 성령께서 의도하신 뜻이고,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강단에 서라. 세대를 불문하고 설교자는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