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고전 11:16)남자들과 여자들이 교회 안에 섬기도록 은사를 받았지만, 목사의 직분은 성경에서 자격이 명시된 대로 남자들에게만 제한됩니다
– 침례교의 신앙과 메시지 2000(링크)
미국 남침례회에서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의 제명을 고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난 5월 6일 새들백 교회에서 릭 워렌 목사가 세 명의 여성 목사를 안수하여 세웠기 때문이다. 새들백 교회는 남침례회에 소속된 가장 큰 규모의 교회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교회로, 교단 자격위원회(The Credentials Committee)에서 제명을 쉽게 결정짓기 어려운 것도 이해 된다(기사). 하지만 남침례회가 2000년에 동의하고 공언한 “침례교의 신앙과 메시지”에 따르면, 이는 명백히 그들의 신조를 위배하는 일이다. 판결이 더딘 것은 결코 그들이 믿고 가르치는 교리가 불명확하기 때문이 아니다. 교리 외적인 요소가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한편 릭 워렌 목사는 68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고 후임 목사를 세웠는데, 캘리포니아 산 호세에 위치한 에코 교회 목사, 앤디 우드와 그의 아내 스테이시 우드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두 사람은 각각 에코 교회에서 인도하는 목사(lead pastor)와 가르치는 목사(teaching pastor)로 일해왔는데, 새들백에 와서도 동일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즉, 앤디 우드는 담임목사로, 그의 아내 스테이시 우드는 가르치는 목사로 동역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후임자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도 릭 워렌 목사는 침례교의 신앙과 메시지에 명백히 위배되는 일을 했다.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6월 15일에 게시된 워싱턴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교단 자격 위원회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침례교가 동의한 ‘신앙과 메시지’ 해당 항목 중 “목사의 직분”에서 “목사”가 의미하는 것이 담임목사만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탭으로 함께 일하는 다른 종류의 책임과 권위를 행사하는 목사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스터디 그룹’을 통해 이를 알아보기로 했다고 한다. 침례교의 신조를 개정하는 데 참여했던 남침례회 소속 알 몰러 박사는 그런 ‘스터디 그룹’은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만일 우리가 선포한 신앙과 메시지를 조목조목 스터디 그룹을 통해 재연구해야 한다면 우리는 망한 것이다’라고 개탄했다(기사).
어떤 사람에겐 왜 이 문제가 이토록 심각하여 제명을 고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는 복음주의의 근본인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 때문인데, 침례교의 신앙과 메시지는 시작부터 이를 분명히 선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영감받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담고 있는 보물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쓰여진 목적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그 내용에는 어떤 오류도 섞여 있지 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전적으로 참되며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원리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지금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기독교적인 연합의 참된 중심이며 모든 인간의 행동과 신조들과 종교적 견해들을 검증할 최고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단 자격 위원회가 결정해야 할 일은 릭 워렌 목사의 행위가 오류가 없고 전적으로 참되며 신뢰할 수 있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 것인지의 여부를 살피는 것이지, 그들이 오랜 세월 인정하고 가르치고 준행해 온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유주의가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본문의 원래 의미를 희석 및 왜곡하는 고질적인 방법인데, 웨인 그루뎀은 그의 책 <복음주의 페미니즘>에서 이를 낱낱이 고발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최초 주창자는 자유주의 교단들이었다.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지지자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논증 가운데는 과거에 자유주의 교단들이 여성의 성직 안수를 주장하면서 이미 사용했던 것들이 많다. 오늘날 평등주의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입장을 주장하거나 그 권위를 훼손하는 책들을 선전하고 권장해 신자들을 자유주의로 기울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이 모든 현상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끈질긴 시도다. 복음주의 페미니즘이 그리스도인들을 가차 없이 자유주의로 향하는 길로 이끌고 가고 있다(CH북스, 339-340pp).
성경을 단순히 인간이 쓴 책으로 보고 현대 사상에 맞지 않는 부분은 그 시대의 오류와 잘못으로 치부하거나, 전통, 경험, 소명, 상황이 본문의 의미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말하거나, 본문의 의미를 현재 이슈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재해석하거나, 당시 상황과 시대에 제한된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현재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등 방법은 다양하다.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는 떨어지고 본문의 의미는 흐려진다. 이 모든 것은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대가다. 릭 워렌 목사가 이번에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열린 남침례회 총회에서 피력한 말속에서 같은 문제를 발견한다.
워렌은 자신의 연설을 남침례회에 쓴 ‘러브레터’라고 말하면서, 남침례회를 믿고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사역했기에, 오렌지카운티에 세워진 149개의 남침례교회 중 90개가 새들백에서 시작된 교회고, 56,631명이 침례에 순종했으며 , 26,869명의 성도를 197개국에 파송했고, 78,157명의 교인이 새 신자로 헌신했으며, 9,173개의 성경공부 모임을 162개의 캘리포니아 남부 도시 가정에서 운영하고 있고, 110만 명의 목사를 길러냈다고 했다(그는 ‘미안하지만, 모든 신학교가 배출한 목사보다 많다’고 언급했다).
이어서 워렌은 2033년이 되면(10년 후)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지 정확히 이 천 년 되는 시점이라고 하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언제까지 부차적인 문제(secondary issue)로 논쟁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영상).
실로 엄청난 숫자, 무시할 수 없는 수적 성장이 아닌가? 이런 결과를 실제로 얻어낸다면,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 비교적 덜 중요한 이슈는 뒤로 제쳐둘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안 머리는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영국 성공회와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신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면서 겪게 된 비통한 역사를 생생히 기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란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세상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것만 요구하고, 그렇게 우리가 소망하도록 몰아간다. 모든 것의 중요성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결과만 가지고 따지도록 만든다. 성공은 숫자로 평가한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남들에게 인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리고 고난받을 만한 가치를 가진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부흥과개혁사, 344p).
빌리 그레이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결단하며 강대상 앞으로 나온 이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교단을 초월하여 심지어 가톨릭까지도 이 엄청난 부흥의 역사에 동참하기 원했고 한 팀이 되길 원했다. 전도를 최고의 우선순위로 삼고 나머지 교리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면서까지 하나가 되고자 했던 영미 복음주의 교회의 노력의 결과는 비참했다. 참으로 거듭난 신자의 숫자는 초라할 정도로 적고, 교회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내버리고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전도’, ‘복음’에 있어서 심장과 같은 교리를 포기하면서까지(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 연합을 꾀하려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성공을 숫자로 평가하고, 명목상 전도를 내세우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뭐든지 타협할 수 있고, 뭐든지 논외로 만들 수 있고,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그런 식의 연합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일까? 확실한 건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미소를 띠지는 않으실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전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의 목적은 제자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분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성경의 권위와 바른 의미에서 발견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이것이 모든 교회의 교리와 신조를 빚어낸다).
우리는 숫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 거듭남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 자라나게 하셔서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른 씨를 뿌리는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지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주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전도’에 있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것은 얼마나 많은 숫자가 침례받았고 새 신자 교육을 받았는지가 아니다. 그들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주가 위임하신 이 대사명에 순종하기 위해 그분이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신 참되고 오류가 전혀 없는 말씀을 왜곡하거나 희석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