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한세월이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마스크, 사회적 거리 두기, 세정제, 온택트,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온라인 예배 등 삶을 송두리째 바꾼 코로나바이러스의 종식을 기원하며 국가에선 최선의 수단으로 백신을 맞으라고 권하고 접종자에게 특혜를 주려고 까지 한다. 경제적-사회적인 면에서 격리 기간을 제외해 주고 모임 인원에 포함하지 않으면 얻는 유익이 적지 않다. 교회도 만일 접종자를 예배 인원에 포함하지 않는다면 더 자유롭게 많은 성도가 모여 예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특혜를 주려는 이유는 정부가 백신을 통해 집단 면역을 만들어 최대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바다.

누군가가 감기 바이러스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서 무슨 처방을 받든(혹은 집에서 그냥 쉬든) 남이 신경 쓸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지만 코로나는 ‘팬데믹’이라 불릴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함께 오랜 기간 싸우고 있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최선의 대응으로 보고 있는 집단면역에 백신을 맞으므로 함께 할 것인지 서로에게 관심도 많고 요구도 많다. 교회에서도 두 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하나는 ‘기독교인이 이웃을 사랑한다면 먼저 본을 보이며 백신을 맞아야 한다’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그리고 부작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백신을 누군가에게 권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사랑이란 동기는 같지만, 어떤 사람은 백신을 권하고 어떤 사람은 막는다.

극단적인 경우,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고 인간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힌 연약한 성도 혹은 자기 건강과 유익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취급한다. 반대의 경우도 극단적으로 흐르면 면역을 파괴하고 자폐 등 없던 질병까지 자자손손 일으킬 백신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 위협한다. 양극단의 목소리엔 혹 사랑이 들어 있을지 몰라도 듣는 이에겐 조금도 그것이 전달되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선택한 것을 존중하며 건강과 안전을 빌어주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백신을 맞거나 맞지 않으려 하는 이에게 사랑을 담아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 단순히 백신을 맞으라고 강권하거나 맞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 말고,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을까?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백신 접종과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있고, 신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알다시피 백신을 맞아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고 일부 드러난 사실처럼 심각한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 백신을 맞지 않는다면 확실히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체질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여러 증상을 보이거나 심각한 경우 사망할 수도 있다(사실 우리는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염려할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다(마 6:27). 다른 사본에서는 ‘키’가 아니라 ‘목숨’이라고 말한다. 염려로는 우리 수명을 하루도 연장할 수 없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의 날들이 모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시 139:16). 백신이나 코로나바이러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날에서 하루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 대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께 아뢰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기도와 간구는 단순히 우리가 구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간청이기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신뢰하며 아뢰는 행위이다. 같은 맥락에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뢸 때 감사함이 함께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든지 그 뜻을 인정하고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겠는가? 절대로 병에 걸리지 않을 거란 약속이나 노년까지 강건하게 잘 살 것이란 약조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하신 날까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그런 내적 강인함 다른 말로는 강한 믿음을 가진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누구보다 무엇보다 강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자고 권면해야 한다. 백신을 맞든지 맞지 않든지.

강건하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 말이 우리가 서로의 건강에는 관심을 갖지 않거나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야고보는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라고 명령했다(약 5:16). 여기서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영혼의 연약함을 가리키지만, 육신이 연약할 때 영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위장병을 자주 앓던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사용하라고 권면하면서 육신의 건강을 돌보기도 했다(딤전 5:23). 예수님은 각종 질병 아래 고통받는 수많은 이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만지고 치유함으로 사랑을 베푸셨다. ‘죽어서 천국 가면 되니까 고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종종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너무 “영적(?)”이어서 코로나바이러스를 두려워하는 성도를 보며 믿음이 없다고 꾸짖고 ‘병 걸리면 빨리 주님 만나고 좋지’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실제로 자신이 중병에 걸리면 진짜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하지만 우리는 성도에게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죽고 나서의 삶에만 신경 쓰시는 분처럼 왜곡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서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영혼의 잘됨”이 가장 중요하다. 평생 건강하게 살아도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면 그보다 끔찍하고 불행한 인생은 없다. 하지만 “영혼의 잘됨”만 중요한 건 아니다. 그와 더불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우리는 서로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범사에 선하고 좋은 것들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 1:17). 백신을 맞든지 맞지 않든지 우리는 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선택한 것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잘됨”과 “강건함”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결론
코로나바이러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었다. 특히 교회가 대면하여 함께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이 약해지면서 성도는 각자 개인의 신앙의 민낯을 발견하고 육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 건강을 챙기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도전에 직면했다.

백신은 코로나를 극복하려는 최선의 시도이지만, 동시에 코로나보다 강한 믿음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백신을 맞든지 맞지 않든지,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님을 더욱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북돋아 주는 자, 하나님 안에서 영혼과 육신 모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여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아버지께 받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가장 강력한 믿음과 사랑의 본을 보여주지 않으셨는가? 서로가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과 판단을 존중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길 간절히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권면과 조언을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망각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잘 되게 하시고 범사에 강건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