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고난주간의 절정인 성금요일이다. 비기독교인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기록한 것처럼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의해 이천 년 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다. 당시 수많은 유대인이 십자가형으로 죽었는데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오는 주일 교회가 기념하는 부활절이 그 대답이다. 예수님은 사흘 후에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

부활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 짓는 확실한 특징이면서 역사적 증거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믿는 예수는 오래전에 살았던 나사렛 출신 랍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가르치셨던 것처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대속은 부활이 없이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 많은 사람 대신이며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일에 유일하신 적임자라는 것과(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그분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것처럼 대속이 조금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끝났다는 것을 선언한다. 부활은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참 소망을 준다.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은 단지 이론으로 정립된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선보인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다.

그런데 매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이나 부활절 행사를 어깨너머 혹은 머리기사를 통해서라도 접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정말 어떤 의미일까? 마치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처럼 이천 년 전 예수님의 부활이 오래된 신화나 허구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상관없이 지금 내 삶에 위로나 소망을 주는 효험있는 이야기, 유익을 주는 이야기면 됐다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 삶의 질과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이야기, 결국 당신의 부활 이야기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자.

당신이 사람이라면 부활은 당신을 위한 일이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극단적인 무신론자를 제외하고는 장례식장에서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며 “이제 완전히 소멸되었어…”라고 탄식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땅을 떠난 슬픔,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지금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 편안한 곳, 슬픔과 고통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왕 솔로몬은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렇게 창조하셨다. 다른 동물은 아무리 지능이 높고 사람을 많이 닮았어도 이 땅에서 주어진 삶 너머를 바라보지 않는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오직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만일 우리 인생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죽음은 왜 찾아오는 것일까? 잠자듯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간혹 있지만 고통스럽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더 많다. 각종 암, 질병, 치매 등 이 땅을 떠나는 방법은 유쾌하지 않다. 아니, 애당초 왜 그런 질병이 삶에 찾아오는 걸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그 한쪽에는 이생을 떠나 영원한 삶을 살 때는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없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만큼 이생은 수고와 슬픔이 가득하다.

죽음 그 너머에 이생과 달리 기쁨과 평안과 행복만 가득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는 왜 막연한 기대나 바람이 아니라 참된 소망이 될까?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실현된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6)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를 부활하게 하신다(“죽어도 살겠고”). 막연한 내생에 대한 기대를 실제로 약속하신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의 부활이다. 당신이 아름다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품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신이 죄인이라면 부활은 당신을 위한 일이다.
부활이신 예수님은 두 종류의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부활이라고 다 똑같은 부활이 아니다. 생명의 부활 그리고 심판의 부활이 있다. 누군가는 죽음을 통과하고 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또 누군가는 죽음을 지나 영원한 심판,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사실 이런 개념은 기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착하게 살다 간 사람을 생각하며 뭔가 보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악한 사람이 죽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을 기대한다. 천만 관객이 본 <신과 함께>는 불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상을 섞었는데 어김없이 의인에게는 천국이, 악인에게는 지옥이 주어지는 운명을 묘사한다.

성경이 말한 대로 또 많은 종교에서 전망하는 대로 두 종류의 부활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부활을 원하는가? 마지막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어떤 부활을 맛보리라 생각하는가?

거의 대부분의 종교에서 점수로 환산하면 100점짜리 선한 삶이 아니라 60점만 맞아도 생명의 부활을 얻는다고 말한다. 삶의 40% 정도는 악한 말이나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기준에 익숙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착하게 살면 생명의 부활 혹은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부활이신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눈이 죄를 범하게 하면 그 눈을 빼어 버리라고 하셨다(마 5:28-9). 이런 죄 한 번 안 짓는 사람이 어디 있나? 눈을 빼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선한 삶과 악한 삶의 기준은 아주 명확하고 단순하다(마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Perfect)

영화 <신과 함께>의 주인공은 십수 년 만에 나타난 귀인(혹은 의인)을 반기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준 그 온전함(Perfect: 완전함) 앞에는 수만 년이 지나도 의인은 나올 수 없다. 선한 삶은 하나님처럼 완벽한 삶, 도덕적으로 악이 조금도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 누구도 죄를 가지고 생명의 부활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믿는 자의 죗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절대 얻을 수 없는 “의인”의 이름을 붙여주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의 운명이 심판에서 생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확증하셨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의 부활이 당신의 부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얻고 심판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을 얻는다. 오직 그 방법밖에는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부활은 당신을 위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이미 죽음 이후의 영원이 있다는 걸 믿는다. 자기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영원한 인생을 기대한다.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얻은 의로 인해 감사하며 생명의 부활, 영생을 기다린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19)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앞서 말한 기대가 모두 헛것이 된다. 죄에서 놓임 받은 것도 아니고 여전히 죄인이기에 생명의 부활을 기대할 수도 없다.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에게도 소망이 없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참되고 죗값이 다 지급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에게 참 소망이 있다.

그런데 마지막 이 표현을 주목해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반대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을 지나 다음 세상의 삶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복된 사람이란 말이다. 무슨 말일까? 부활의 가르침을 전파한 후 바울이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이 말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이 땅에서 사는 매일의 삶이 헛되지 않은 건 이 땅에서 수고한 것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헛되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예수님의 부활이 당신의 부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일상에 의미가 있다. 당신의 수고와 헌신에 보상이 있다. 당신은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에서 주를 위해 수고한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부활하신 예수님께 받는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고(마 25:40), 작은 것에 충성한 자를 칭찬하시면서 큰 것에도 충성되리라 말씀하셨다(눅 16:10).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어느 부자의 무덤에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역사적 사실). 이 사실은 당신에게 더 나은 내세를 꿈꾸게 한다. 수고와 슬픔, 고통과 죄악이 가득한 이생을 떠나 눈물과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없는 곳을 막연하게가 아니라 실제로 소망하게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이 생명의 부활을 확신하게 한다.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당신을 의롭다 하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내세는 심판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로 완전히 바뀐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일상을 바꾼다. 하루 24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결코 헛되지 않도록 이생에 심은 것을 이생과 내세에 열매 맺게 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당신의 부활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오는 부활절, 부활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죄를 자백하고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마음, 매일의 삶 속에 부활을 누리는 마음, 영원한 것을 추수하기 위해 심는 마음을 품자. 부활은 오늘도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