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생각, 내 지혜는 다 쓸데 없는 것인가? –

“내가 죽는 다는 말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사도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주 명료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죄의 종 노릇 하던 내가 나의 옛 자아, 나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버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구원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영화롭게 변화된 몸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옛 육체, 옛 자아가 원하는 바, 죄의 종 노릇 하기를 원하는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의 욕심, 옛 자아를 좇지 말고 새롭게 변화 받은 영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어집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5-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살전 4:3-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4-15)

사랑하는 자들과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벧전 2:11-12)

이 말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삶의 방식을 버릴 것과 새 삶을 입을 것이 명령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영적 전쟁에 대하여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18-25절을 통해 그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맞붙는 영적 전쟁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소망 없는 한탄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2-1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바로 옛 자아와의 전쟁이며
더럽고 추악한 죄악된 삶을 버리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성화의 과정에 내 생각, 내 지혜, 내 계획은 쓸데 없는 것인가? 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도표를 보고 이후에 주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앞에서 본 성경 구절들에서 우리는 공통적으로 신자에게 주어진 명령을 살펴보았습니다.
1. 옛 사람을 죽이라, 버리라, 제어하라
2. 새 사람을 입으라, 거룩함을 입으라, 성령을 따라 살라

이제 질문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 각 그리스도인 개인입니다.
모든 생각과 뜻과 지혜와 힘을 다해서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은 바로 입니다.

나의 지적 능력, 지혜, 힘, 에너지 그 자체가 더럽고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옛 사람의 소욕을 따라 사용 될 때에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가진 지능, 재능, 지혜, 힘, 에너지, 은사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그분의 뜻을 위해
사용 될 때에 우리는 거룩한 삶, 변화된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칼이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될 때, 사악한 무기가 되지만
맛있는 요리를 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도구가 되듯이
우리의 지혜, 지능, 힘 등은 어떤 것을 위해 사용되느냐에 따라 좋은 도구가 될 수 있고 나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3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나의 생각, 지혜, 노력, 힘, 은사 그 모든 것 자체가 나쁘고 버려야 할 것이며 내려 놓아야 할 것이고, 죽여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율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 신약에 와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첫째 되는 계명을 보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 4:29; 6:5; 11:13; 13:3; 30:2, 6; 마 22:37; 막 12:30; 눅 10:27).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내 힘과 뜻과 지식과 지혜 자체가 쓸데 없는 것이며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온전히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류의 설교에는 이 부분에 큰 오해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하는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옛 자아, 옛 자아에 속한 계획,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내가 해야지…' 하고 계획하면 절대로 그렇게 안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과 공부가 이상하게 잘 안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내가 내 생각과 지혜를 따라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계획, 직장, 결혼 등을 내 생각과 지혜로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생을 망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의의 도구로 온전히 사용될 수도 있는 나의 지혜, 생각, 힘과 뜻이
완전히 옛 자아의 악한 것과 같은 것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

”칼은 잘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칼을 잘못 사용하면 살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칼을 선한 곳에 사용할 때, 우리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을

“칼은 무조건 나쁜 것입니다. 칼을 쓰면 망하게 되어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능, 재능, 물질, 뜻과 힘, 노력은 옛 자아를 위해 사용되면 안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 되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을

”나의 생각, 지혜, 계획, 노력이 다 불필요하며 그것은 무조건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 지혜, 힘과 계획을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오늘 한가지만 언급하고 다음 칼럼에 몇 가지의 문제를 더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2세기 초, 초대교회가 싸워야 했던 이단의 교리 중 하나가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이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 종교사상을 기독교 내로 끌고 들어왔던
영향력이 큰 거짓 철학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목회서신서에서도 경계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문제가 초대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를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 (행15장)이 율법주의를 다루었다면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영지주의가 교회가 처단해야 할 이단으로
규정되고 기독교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영지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오류는 이분법적 사고이며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인 것은 성스럽고 선하고 좋은 것이며 육체는 더럽고 악한 것이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가졌던 사고의 문제가 이와 같습니다.
”내 생각, 내 지혜, 내 계획은 다 악한 것이고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지혜, 계획, 뜻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을 짓는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기본적인 인간의 지능, 지혜, 힘, 뜻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로
영지주의가 기독교 안에 퍼뜨린  두 가지 큰 폐해를 가져옵니다.

첫째, 인간의 생각, 지능, 지혜, 힘과 계획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시각입니다.

영지주의가 육체적인 것은 모두 악하다고 잘못 규정한 것과 같이,
특별한 설명 없이 “내 계획, 생각, 지혜는 다 쓸데 없다”, “버려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죄책감을 가져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내 생각을 가지고 쓰는지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쓰는지
알 수 없으며 혹시나 내 생각으로 쓰는 것일까? 의구심과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대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도
그것이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공부하는지, 하나님의 지혜와 노력으로 공부하는지
비성경적인 이원론적 사고로 불분명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누가 내가 가진 지혜와 생각, 계획과 뜻 그 자체가 악한지 선한지를 말해줄 수 있을까요?
주의 영광을 위해 주가 맡겨주신 학업에 최선을 다하는 학생에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과 계획은 다 인간적인 것이야, 버려야 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체력과 지혜, 지식과 계획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내게 허락하신 지능과 재능, 힘과 뜻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명령하시지만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불필요하고 악하며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부정적 시각은
마치 마라톤을 뛰려는 선수에게 너의 계획과 힘과 체력을 사용하지 말고 뛰어라! 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능력과 힘과 지혜와 계획을 최대한 활용하여
너에게 주어진 코스를 최선을 다해 뛰어라!
라고 성경은 우리 앞에 놓인 이 영적인 경주를 힘차게 뛸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내 힘과 능력과 지혜와 계획을 다 버리고 뛰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앞에 주어진 경주에 수동적으로, 불확실하게, 불명확하게, 소극적으로 임하게 만듭니다.

자, 이들에 의하면 우리는 생각, 지혜, 계획, 뜻, 힘을 다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악한 것이니까요.
대신 우리가 신뢰하고 붙들라고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비롭고 성스러운 더 나아가 미신적인 영적 계시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신 분명한 말씀 외에 신비주의적이며 성스러운 영적 계시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때론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말씀 대신 다른 말씀을 마음에 주셔서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나누기 원합니다.”

“미리 설교를 준비해오기 보다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으로 오늘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자꾸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그것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저에게 새롭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라고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라는 마음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라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2세기 기독교를 흔들어 놓았던 영지주의자의 두 번째 큰 오류가 바로 이것입니다.
분명하게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 보다
영적인 것, 성스러운 것, 신비로운 것, 하나님 혹은 성령님의 음성, 영적 계시를 추구합니다.

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내게 주신 지혜와 힘과 뜻을 다해 순종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을 해석하고 모든 삶의 결정을 계획하며 모든 환경에 대한 대처하는 법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계시, 뭔가 신비롭고 영적이며 성스러워 보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러한 신비롭고 성스러운 계시는 늘 감정에 호소합니다.
뜨거운 사랑, 놀라운 계시, 뜻밖의 인도하심, 분명한 음성….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늘 순종을 가리킵니다. 의지적인 순종이며 행동의 변화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자가 날마다 해야 하는 “죽음의 삶”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첫째 관심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영적 계시를 듣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베드로의 말씀만큼 분명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16-18절까지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참으로 놀랍고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영광을 친히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까요?

베드로는 계속 말씀합니다 (벧전 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과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한 베드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영지주의의 커다란 폐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더 확실한 것은 그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음성
영적이고 신비롭고 성스러운, 실시간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의 고백에 잘 담겨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그런 뜻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은 저에게 분명히 이 말씀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일주일 동안 하나님 말씀을 준비하고 공부하며 직접 설교할 것을 연습해본 사람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자기 생각과 지혜와 계획을 좇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도
일주일 동안 눈물로 금식기도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린 사람은
지극히 영적이며 옳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지혜와 생각을 좇는 사람입니다.

저는 조금 힘주어 이렇게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전할 말씀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그 본문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또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는 것, 환상으로 주셨다는 것,
계획과 뜻을 품게 하셨다는 것…그 모든 신비로운 표현들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과 사탄으로부터 온 것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신 힘과 지혜와 지능과 재능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부지런히 힘쓰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힘과 지혜와 지능과 재능을 다 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내어버리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성경 말씀 보다는
미신적이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주신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둘의 차이를 설명하기 원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들은 “성경적인 성화”를 따라 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들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의 주인이 명령하신 그 분명한 말씀에 따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주인이 하신 명령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도 땅에 묻어 버립니다.
이것이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성화”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재능, 지식, 힘, 뜻은 다 땅에 묻어버리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나에게 분명하게 주신 명령도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신적이고 신비로운 영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신령한 것처럼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 만족감과 뜨거운 감정이 하나님을 닮아가며 동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성화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너무도 확실한 길이지만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화의 길은 미신적이고 신비로운 계시와 경험을 추구하는 알 수 없는 길이요
불확실한 삶인 것입니다.

이 불확실성이 맺는 열매들은 참 다양합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화의 개념이 주는
여러 가지 폐해들에 대하여 나누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