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엔 참 많은 명령이 나옵니다. 명령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떤 예식은 아주 많이 강조되어 마치 명령으로 주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왠지 하면 좋지 않을까?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계속해서 반복하여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금식”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금식이 46번 정도 언급되었습니다(삿 20:26; 삼상 7:6; 삼하 12:16, 21-23; 왕상 21:9, 12, 27; 대하 20:3; 스 8:21, 23; 느 1:4; 9:1; 에 4:16; 9:31; 시 35:13; 69:10; 109:24; 사 58:3-6; 렘 14:12; 36:6, 9; 단 6:18; 9:3; 욜 1:14; 2:12, 15; 욘 3:5; 슥 7:5; 슥 8:19).
신약성경에는 23번 나옵니다(마 4:2; 6:16-18; 9:14-15; 막 2:18-20; 눅 2:37; 5:33-35; 눅 18:12; 행 13:2-3; 14:23; 27:9).
우리 구주 예수님도 금식하셨습니다(마 4:2). 장로들이 금식할 때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불러 이방인을 위한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행 13:2-3). 그들은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울 때 금식 기도했습니다(행 14:23). 다윗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했고(삼하 12:16), 아합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왕상 21:27).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참혹한 실정에 대해 듣고 슬퍼하며 금식하였습니다(느 1:4).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결심했습니다(단 9:3).
이 기록을 보면 왠지 금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성경이 금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슬픈 기색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 6:16-18).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마 9:14-15).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한 바리새인은 금식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남깁니다(눅 18:12).
역시 금식은 전통적 율법적 예식이므로 지양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금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신약에 금식이 부정적으로 언급된 것은 금식 자체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잘못된 금식 태도나 어긋난 목적으로 하는 금식에 대한 비판입니다. 금식 그 자체에 대해 성경은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금식기도 한 번 안 해보고 주님을 만나도 될까요?
대학생 때 한 번도 살면서 금식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실망을 하고 하루 저녁을 거르기로 한 적이 있습니다. 슬슬 배고파지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괴로움이 찾아오고 이것이 바로 주를 따를 때 느끼는 배고픔이고 고통이며 내가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날이 룸메이트의 생일이었고 생일파티 음식으로 배달온 탕수육과 짜장면, 치킨과 탄산음료 앞에 생애 첫 금식의 결단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금식, 단순히 해야 하는지, 안 해도 되는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하는가? 입니다. 사실 그 질문에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시도했기 때문에 쉽게 실패하고 실패해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 금식할까요?
금식은 기도의 능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 없이 드리는 기도보다는 금식하며 드리는 기도에 힘이 더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산을 옮기는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믿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산을 옮기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금식이라는 특별 수단을 이용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더 끌어올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은 기도의 능력을 배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나 밥 안 먹어!”라고 떼쓰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하는 것처럼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더 강하게 요구하고 얻어내려는 목적으로 하는 금식은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 보이고자 기도하는 자를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다윗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여호와여, 내가 말을 혀에 담기도 전에 주께서는 그것마저 다 아십니다(시 139:4, 우리말성경)
물론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알고 계시더라도 우리는 구할 수 있고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금식이 우리의 간구의 능력을 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아시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구하는 기도에도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과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금식은 나 자신을 수행하기 위한 훈련 도구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단식원에 들어가 음식을 먹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처럼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물욕과 식욕 등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훈련을 통해 더 거룩하고 한 단계 높은 정신의 상태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를 통해 우리가 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단순히 내 정신을 훈련하고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의 원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신뢰하는 기도를 더 높은 경지에 올라 모든 것을 초월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려는데 사용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며 병자를 고치다가 실패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29). 기도나 금식은 나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 능력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내가 처한 환경을 분명히 인식한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분께 아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배가 불러야 좋다는 말입니다. 배고프면 아무것도 즐거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사람들은 종종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을 씁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렬한 욕구가 식욕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것이 아무리 채워져도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은 그 기본적인 식욕을 일부러 채우지 않는 행위입니다. 종종 우리는 몸무게를 조절하기 위해 단식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식 기도는 다른 목적을 가집니다. 바로 기도를 위해 식욕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강렬하며 필수적인 식욕을 채우는 일보다 내가 지금 기도하는 그 일의 중요성을 더 크게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 기도 제목을 아뢰고 그분의 응답을 기대하며 그 선하신 손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이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까지 구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지금 밥이 넘어가냐?”라는 말을 합니다. 밥 보다 더 중요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영적 상황이 우리 주변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날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독한 질병과 매 순간 치열하게 싸우면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성도나 가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차갑게 식어 아무런 감사나 기쁨 없이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사회가 급격히 타락하면서 사람들이 죄를 사랑하고 죄에 대해 관용하며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아주 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를 밝게 비추는 빛과 썩는 속도를 더디게 만드는 소금 역할을 해야 하는데 거의 차이가 없이 타락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이런 처절한 현실을 인식한 사람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은 온전히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밥을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선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만이 이 영적 사안을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론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습니다.
나는 식욕을 채우는 일보다 더 급하고 절박하게 내가 처한 영적인 환경에 대해 문제 인식을 해본 적이 있는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는’ 그 문제의 심각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간절히 구해본 적이 있는가?
나의 눈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매일 매일의 육적인 양식은 빠짐없이 먹고 있으면서 영적인 빈곤과 궁핍함을 이렇게 방관하며 살아도 되는가? 매 순간 식욕을 채우는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처럼 영적인 필요에 대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면에서 올바른 목적으로 행하는 금식은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영적인 상황에 늘 깨어 있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고 선하신 뜻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삶을 살게 한다는 점에서 아주 유익하고 경건한 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식기도 한 번도 안 해보고 주님 만나도 됩니다.
주님은 내가 금식 기도를 했는가 안 했는가를 평가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추구했는지 보실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었는지 하늘에 쌓아두었는지 보실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구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위해 살았는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살았는지 판단하실 것입니다.
주님 만나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한 번 물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