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 선택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게 사랑인지 저렇게 하는 사랑인지 복잡하고 헤깔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명확하게 말합니다.
요이 1: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진리)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그것이 곧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사랑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동성애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동성애가 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동성애만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임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혐오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 태도에 때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결국은 ‘동성애는 죄’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세상은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0절의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 그럴 것입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그”는 7, 9절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불신자라면 오히려 더 영접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당시의 순회 교사로서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도 이렇게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세워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여러 지역으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니면서 거짓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을 절대 영접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경고까지 합니다(11절).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요한이서의 저자들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문화는 나그네에 대한 ’접대’가 매우 중요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을 그렇게 매몰차게 쫓아내는 것은 자신의 양심도 허락하지 않고 또한 남들의 따가운 시선도 느껴지는 그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거짓 교사라고 해도 잘 대접해주는게 사랑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 누군가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기에 사도 요한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강력하게 주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영접하는 것으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을 더욱 퍼뜨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을 믿고 전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잘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을 버리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생각할 때도 오히려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매우 근시안적인 혹은 표면적인 사랑만 생각하다가 성경이 말하는 더욱 본질적인 사랑은 놓칠 때가 있습니다. 당장에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내 마음은 편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닐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걸하는 아이에게 돈을 주면 내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 돈으로 그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안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사랑이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