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은 참 교묘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한 “혼인”과 “음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에게 쾌락을 즐기며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이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에 대치된다는 것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쾌락 즐기기를 조심해야 하고 먹는 것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아마 동의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거짓은 처음부터 거짓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당연히 동의할 수 있는 진리에서 시작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죄이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결혼은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 중 하나로서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경건하고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말은 좀 더 설득력을 얻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어떤 음식은 정하고 어떤 음식은 부정하다고 하셨는데, 당연히 지금도 정한 음식을 먹고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으면 그 또한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선택의 문제라면 더 나은 쪽을 선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거짓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금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거짓 교사들은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웠을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참된 경건의 모습으로 강조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경건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이런 거짓의 교묘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교회는 진리를 옳게 분별할 뿐 아니라 그 진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때도 유의해야 합니다. 진리를 적용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적용을 진리 자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어떤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는 같은 목적으로 어떤 음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의 청지기로서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음식 먹는 사람이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거짓은 교묘하게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본적으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특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옳다고 지지해주면서 다른 선택은 틀렸으니 지적하고 대항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게 거짓을 따르면 교회는 진리가 아닌 진리의 껍데기를 가지고 싸웁니다. 그러면서 정작 진리는 방치되고 변개되게 내버려 둡니다.
그래서 내가 지키고 있는 것이 정말 진리의 본질인지 혹은 진리의 껍데기인지 잘 점검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껍데기에 목숨 걸지 않고 본질에 목숨 걸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짓에 속지 않기를 원합니다.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여 우리 교회가 진리와 기둥의 터로서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