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초대 교회에게 계속해서 어려움이 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과는 자신들이 다르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한 두 해가 아니라 아브라함 이후로 보면 거의 2천년을 그렇게 살았고, 모세를 기준으로 봐도 1,500여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해서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쉽게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반복되는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셨고, 이방인이 구원 받을 때도 동일한 성령이 임하심을 직접 볼 수 있게 나타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고넬료 사건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에서 한 차례 큰 논쟁이 있었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을 가지고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주셨음을 말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이 구원 받아 교회에 더해지자 다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결국 교회는 이 문제를 공적으로 다루어야만 했고, 그것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최초의 교회 공의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크게 두 가지 결론을 내립니다. 첫째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또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혹은 그 이전에 빌립과 같은 전도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볼 때 이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이는 또한 구약에 이미 예언된 것이기도 했습니다(15-18절). 따라서 아무리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이는 받아들여야하는 진리임을 교회는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서 유대인들에게 혐오감과 적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은 이방인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구원을 결정하는 본질적 요소는 아니지만 유대인 성도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였습니다. 본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이방인 교회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노력해야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나되어 진리를 선포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내 생각을 일방적으로 접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 감정의 소리를 묵인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렇게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내가 어떤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럴 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그렇게 하나됨을 추구하는 나와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