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표현은 정말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표현은 2절에 언급된 유대주의자들을 특정할 수도 있지만, 17절의 문맥을 고려하면 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19절이 말하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이나 다른 리더들처럼 계속해서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을 본받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17절). 즉,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삶에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9절은 그들의 신이 “배”라고 말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부끄러워할 일을 자랑합니다. 또한 이들의 관심은 오직 땅에 속한 것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유대주의자들이나 혹은 반율법주의자들이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에 둡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는 일들을 자랑합니다. 오직 이 땅에 속한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결국 19절이 묘사하는 사람은 모든 죄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 모든 특징에 한 가지 특징이 더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만듭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를 통해 그리스도롤 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원하게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13-16절에서 말한 삶을 특별한 사람의 것으로 여기고 그런 삶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구원과 구원 이후의 삶을 마치 별개인 것처럼 여기고 거룩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그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그냥 연약한 상태에 있는 것일 뿐이고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다른 생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하고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선포합니다. 그저 천국에 가서 상을 덜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느냐의 문제입니다. 스스로 아무리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해도 끝날에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실 것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 삶이 19절과 같은 특징을 나타내지는 않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자체가 내 삶의 특징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넘어지는 것에 둔감해지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내가 십자가의 원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원수처럼 행한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날 구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죄에 더욱 민감해야 합니다.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고 하늘에 속한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소망하고 기뻐해야합니다. 원수였던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한순간이라도 다시 원수처럼 행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