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죄가 나쁜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를 짓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죄가 주는 쾌락을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며,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나쁘게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음행(부부 관계 외에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인 죄)을 봐도 그렇습니다. 성에 대한 가치관은 매우 빠르게 (안좋은 쪽으로) 변화되어 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자행하는 음행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 관련된 책을 읽고 영상을 보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상상일 뿐이고 실제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실제로 죄를 범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것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음행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것을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마 5:27-28). 결국 동일한 죄악된 결과를 원하는 같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음행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라고 생각하는 선 직전까지는 죄가 아니고 그래서 괜찮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불이 나를 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그것이 불을 품에 품고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27절). 숯불을 밟고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28절). 불을 품고 있으면서 타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숯불을 밟고서 발이 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렇게까지 나빠보이지 않는 무엇을 가까이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로 그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합니다(21절). 그래야 다닐 때도 그 말씀의 인도를 받고, 심지어 잘 때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22절). 죄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는 우리의 노력을, 반대로 말씀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는 노력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님의 현관문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는 말씀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했는지 생각해 보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노력이지만, 말씀을 가까이, 내 마음에 두려는 이런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등불이며, 빛이며, 생명의 길인 말씀이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23-24절).
오늘의 한 구절: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잠 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