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우리는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사람은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교만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를 포함한 모든 가족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도 하셨습니다(눅 14:26).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편 기자의 태도도 극단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반대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미워합니다(113절).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그러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며 선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왕상 18:21). 그렇게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말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114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115절).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고 담대하게 구하기도 했습니다(116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선택한 그의 삶의 결과가 부끄러움이 되지 않기를 구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시편 기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적당히 여기저기 믿을 구석을 만들어두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모습이 어떤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무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해 말하면서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5:19). 부활이 없어도 별로 불쌍하지 않고, 말씀대로 되지 않아도 별로 손해볼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사실 우리는 두 마음을 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여, 내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 붙들려서,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한 구절: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