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심”(22절)이라는 것은 오직 사람만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동물도 초월적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느 지역 어느 문화권에 가도라도 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교심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현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입니다(전 2:11).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종교심이 향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입니다. 종교심은 때로 사람이 기꺼이 그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그의 믿음을 참된 것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무엇을 믿든 진실되기만 하면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진실되게 1+1=3이라고 믿어도, 그 믿음이 정답을 3으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되게 자살폭탄데러를 하면 천국에 간다고 믿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믿음이 그를 천국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를 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말했습니다(23절). 아덴 사람들은 분명 종교심이 있었지만, 그 대상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셔야 합니다(24-25절).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든 신, 사람이 돌봐주어야 하는 신이 아니라, 사람을 돌보는 신, 바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차피 그 하나님도 유대인이 만든 신이 아니냐고 누군가는 반문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31절). 그리고 받드시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렇게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며 예배의 대상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27절). 일부러 우리가 찾지 못하게 숨어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믿을 수 있는 증거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27절).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며, 내 주변에 아직 하나님을 찾지 못한 자들이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한 구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