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에서 바울은 참을 수 없는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변론하면서 예수님과 부활을 전했습니다(18절). 그러자 사람들은 바울에게 공적으로 그의 사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이에 바울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그리고 회개의 명령에 대해서 설교하여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어제 말씀의 메시지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 때문에 복음의 내용이 달라진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어제 말씀의 메시지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입니다.
일단 아덴에서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은 ‘예수와 부활’이었습니다(18, 32절). 이는 다른 곳에서 전했던 복음의 핵심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복음의 내용이 바뀌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그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이 전에 기록된 설교에서는 주요 대상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행 17:1-3).
하지만 아덴에서 바울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다양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성경을 가지고 말하기 보다 성경의 진리를 잘 풀어서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 더 알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가지고 더 분명하게 복음을 전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32-34절).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부활이라는 메시지의 핵심은 동일했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같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부분이 ’사람들이 복음을 더 잘 듣게 하기위해‘ 우리가 노력해야할 부분입니다. 그냥 ’예수천국 불신지옥’만 외쳐놓고 안믿으면 너만 손해라는 식으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하지만, 마치 자신은 아무 죄가 없는 사람처럼 정죄하는 태도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아무리 우상을 섬기고 있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어리석다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말 다툼을 하는 중에 “당신의 말이 아니라 당신의 태도 때문에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이렇게 반응하지 않게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당신의 태도 때문에 당신의 말이 듣고 싶다”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에서 필요한 지혜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마음에 격분”한 가운데서도 침착하게 듣는 자들을 존중하며 복음을 전했었던 것처럼, 우리도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