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에 제목을 붙인다면 “누가 진짜 맹인인가?”일 것입니다. 본문에는 맹인이었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지만, 본문의 끝에 누가 진짜 맹인인지가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일상처럼(?) 느껴지는 일이 또 다시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셨고, 이 일로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이 논쟁을 바리새인들에게 가져갔는데,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러한 표적을 행한 것을 보니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16절).
이런 논쟁 중에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렀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24절). 그래서 예수님의 표적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 원래 맹인이었던 것이 맞는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캐물었습니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30-33절).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은혜를 베푸셨음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부모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공적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21-23절), 그 결과로 유대 사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34절).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말씀해 주셨고,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38절). 흥미로운 것은 그 장면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자(39절),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며(40절) 자신들이 맹인임을 부정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1절).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영적인 맹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던 맹인들이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잘 볼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니라 사람들을 미혹하는 죄인이라고 분별했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굳게 믿었던 그들은 그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메시야를 보지 못하는 가장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많이 사용하는 표현 중 ‘메타인지(자기객관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몰라도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가 메타인지가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맹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다면, 오늘 말씀의 눈 뜬 맹인과 같이 예수님께 감사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선포해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던 나를 보게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39절).
오늘의 한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