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동일하게 계시지만,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며 즐겁고 감사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마치 하나님이 다른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찾았습니다(1절).
그는 과거의 기쁨과 감사를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던 때를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억이 오히려 더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3절). 과거의 빛이 지금의 어둠을 더욱 어둡게 느껴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기쁨이 지금의 슬픔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들리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3절)라는 말은 정말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던 과거라면 논리적으로 대응하기도 하고, 혹은 더욱 당당하게 “지금! 여기!”라고 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도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겉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답을 했겠지만, 사실 그 질문은 그 자신이 계속해서 하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어쩌면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시편 기자는 여기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하나님을 계속해서 찾으며 자신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5절) 그리고 그의 혼잣말은 확신으로 변합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조언을 잘 하면서 정작 같은 상황에서 자신은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은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만, 자신의 일은 주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황에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기 시편 기자처럼 자신의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그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며 무엇이 옳은지 말해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옳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찬송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한 구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