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이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신 이들의 심각한 문제는 ‘미지근함’이었습니다(15-16절). 영적으로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엘리야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예 버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고 있고 교회에 나오고 할 일들은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순종하며 헌신의 열매를 맺고 있느냐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면 원리에 따르면 이들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즉, 이들의 상태에 대해서 긍정형이 아닌 부정형으로만 정의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도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상태였습니다.
이런 미지근함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구역질이 나고 역겹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심각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17절). 자신들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미지근함을 고려해 보면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았을지 모릅니다. 극단적(?)이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이질감도 없고, 그러면서 신사적이고 좋은 일도 하고 그러니 충분히 칭찬 받았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칭찬을 좋은 간증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미지근함이 교회 안에서 좋은 모습으로 자리 잡으면 주변에도 그런 영향을 주기 쉬워 집니다. 불신자도 저런게 믿는거면 나도 믿는다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열심이 있었던 성도는 저렇게도 신앙 생활할 수 있고 칭찬도 받는데 괜히 자기만 과하게 열심히 할 필요있나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함께 미지근해지고 아무도 그것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 문제이지만,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는 훨씬 더 그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라오디게아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상식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미지근한 교회들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세상이 용납 가능한 수준에서만 다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의 접점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만 늘어납니다. 불신자라고 말하기도 신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들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주님의 은혜로 교회가 부흥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유일한 희망은 19-20절입니다. 주님은 그래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하고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열심을 내고 회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들과 함께 더불어 먹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라오디게아와 같은 교회, 그리고 성도에게도 유일한 희망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냥 적당히, 남들처럼’이 우리의 모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께서 역겨워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뜨거운 교회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