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우리 관점에서는 비슷한 느낌이 있지만 실제로는 꽤나 다른 두 그룹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바리새인은 좀 더 종교적이었다면 사두개인은 좀 더 정치적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비롯해서 내세나 영혼의 불멸 등 영적인 것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두개인보다 바리새인을 더 많이 책망하셨던 것은 흥미롭습니다. 아마 사두개인은 최소한 일관성이 있고 따라서 그 잘못이 명백하게 보이지만, 바리새인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이 부정하는 그 모든 영적인 실체를 인정했지만 그 믿음에 일관된 삶을 살지는 않았고, 그것이 실제적으로는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더 드러낼 필요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도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사는 사람과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자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 후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믿기는 하니까, 그래도 아예 세상으로 나간 것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천국문을 막고 있는 바리새인일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주변에서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데, 애써 그의 말로 실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을 믿고 영원한 삶을 믿는다면 그에 일관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삶은 분명 다른 삶이 될 것이고 그것이 사람들 눈에 띌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구별된 삶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삶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삶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정말로 믿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삶이 달라야 합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자녀 양육의 모습이 달라야 합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를 믿기 때문에 오늘을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믿음에 합당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