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대한 성경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당연히 그렇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1을 희생하여 100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합니다. 아마 돈으로 비유하면 훨씬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만원을 투자하면 무조건 100만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 1만원이 부모님이 남기신 유품이라면 고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00만원이 아니라 1억 혹은 그 이상이라면 (부모님도 이해하실거라 여기며) 유품이라도 투자하는게 맞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삶이 ‘영원’함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삶은 잠깐이고 우리가 지금 보지 못하고 있는 영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영원은 끝이 없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길든 그것은 영원에 비하면 모두 0으로 수렴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영원에 속한 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반대로 이 땅에 속한 것은 무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썩고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투자’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땅에 속한 것이라도 영원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룬다고 말합니다(17절). 질그릇에 담긴 보배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에는 환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는 영광이 뒤따릅니다. 환난은 지금이고 영광은 나중입니다. 이 둘을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하면, 환난은 가볍고 영광이 무겁습니다. 살짝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무겁습니다. 영광에 비하면 환난은 무게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고 지금 환난을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모두 그렇게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환난을 선택하면 모든 것인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고 비상식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환난은 ‘보이는 것’인데 영광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가 모든 선택을 바꾸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7절). 믿음은 구원 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은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보는 것으로 살게 되고 그 삶은 무의미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단순한 수학 문제입니다. 누구나 답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 그 답을 내 삶에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을 더 구해야 합니다. 더 선명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복음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약속된 영원을 바라볼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보는 것’으로 삽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