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예루살렘행은 복음 전파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복음은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해서 주변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갔습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고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성령의 임하심이 분명하게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사마리아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 민족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은 당시 세상의 중심이자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로마를 향합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행 23:11). 하지만 그 방법은 또 다시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에서 결박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들에 의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울은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은 처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땅 끝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알고 있지만, 바울을 비롯한 그 당시의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을 막아섰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에게 그때까지 드러났던 계시에 비추어 진실된 마음으로 바울을 권고했을 뿐입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4절의 표현을 보면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11절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성령의 말씀을 전했고 그 말을 듣고 바울의 일행과 그곳 성도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12절).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성령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핍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 20:23). 다만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한다는 성령님께서 주신 확신이 있었을 뿐입니다(행 20:22).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좀 쉴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의 말처럼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 예수의 이름”이었고(행 21:13) 그분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행 20:24). 그것을 위해 자신이 고난을 받든 혹은 반대로 평안한 삶을 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과 바울은 어찌보면 상반되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 과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때까지 그들에게 드러났던 계시에 따라 진실된 마음으로 판단하고 옳은 것을 선택했던 것 뿐입니다. 그들 모두가 결국 원했던 것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14절).
우리는 어떤 사람의 선택을 보면서 그 사람의 성향이나 환경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어쩌면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 요소를 고려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해서 말할 때, 이렇게 말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은 항상 성경에서 말한대로 하잖아. 참 예측하기 쉬운 사람이야.”
내 삶의 기준이 내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내 성향, 성품,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뜻이 내 삶의 기준이 되기를 원합니다. 결과에 대한 염려는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순종하며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