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본문 : 베드로전서 5장 5-7절
설교자 : 조정의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본문 말씀을 잘 살펴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젊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1절 말씀에 나오는 ‘장로’와 비교했을 때 젊은 자들입니다. 당시 장로들은 모두 나이가 많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인도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젊은 자들은 나이 많은 장로들을 제외한 사람들, 즉 인도자의 돌봄을 받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본문 말씀의 또 다른 대상은 “다”입니다. 이는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명령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명령은 세 가지입니다. 젊은 자들에게 주어진 명령인 “순종하라”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겸손하라”입니다. 이는 모두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순종과 겸손은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는 겸손히 서로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장로들에게 주었던 명령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이와 같이”). 장로들이 교회 안에서 양 무리를 치는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이것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하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성도를 섬기고, 성도는 그들의 가르침과 교훈에 순종함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맡은 역할이 다를 뿐이지 어떤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로들에게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양을 치라고 했던 것처럼, 양들에게도 자원함으로 장로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장로들이 더러운 이득이나 사람들의 관심, 인기를 얻기 위해 일해서는 안 되듯이, 양 무리들도 다른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인도자들을 따라야 합니다(고전 16:15-16; 살전 5:12-14; 히 13:17).
장로들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히려 겸손하게 양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권위를 가지셨지만 제자들을 겸손히 섬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양들도 겸손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인도자들을 따라야 합니다. 인도자와 양이 하나님이 주신 역할 안에서 충성되게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양 무리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고 그에 대해 보상하실 것입니다. 어떤 책임을 물으실까요? 인도자들에게는 양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방향으로 잘 인도했는가, 겸손히 본을 보였는가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양들에게는 어떤 책임을 물으실까요? 목자들에게 순종하였는가, 겸손히 그들의 가르침을 따랐는가로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보상하실 것입니다.
젊은 자들은 인도자들에게 순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5장 1-5절 말씀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찔림이 됩니다. 저 자신이 목자로서 양들에게 본을 보이고 있는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돈과 명예보다 성도들의 영적인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그들을 진심으로 돕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저는 목자장이신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럼 없는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도 5절 말씀을 보시면서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도자들에게 얼마나 순종했는가, 겸손히 그들의 가르침을 따랐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다”). 그런데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5)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6)는 둘 다 겸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5절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가져야 할 겸손이고, 6절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말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5). 허리를 동이는 것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처럼 의복을 단단히 동이는 것, 종이 주인을 섬기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기실 때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 겸손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겸손의 의미는 동서양이 조금 다릅니다. 서양 헬라 문화에서는 겸손이라는 것은 조금 저급하고 수치스러운 태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 겸손은 미덕입니다. 제가 강단에 서서 스스로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겸손해 보일지 모르지만 책임감이 없는 모습이기도 하고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적인 겸손은 무엇일까요? 겸손은 겉 따로 속 따로인 태도가 아니고, 자기비하나 노예근성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은 적극적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높게)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 앞에서 나의 신분, 지위, 위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배경에 따라, 나이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신자와 막 구원받은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우고 싶으면 내세우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겸손은 그런 것들을 철저하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내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이 사람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다’,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출입문을 들어오실 때 마음 속에 앞치마를 하나 두르고 들어온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겸손을 몸에 두르고 모든 성도들을 섬기겠다, 겸손히 대하겠다는 마음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허리를 동이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잠언 3:34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교만을 벌하시고 겸손을 칭찬하시는 분입니다. 교만을 심판하시고 그것과 싸우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시 138:6).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16:5).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앤드류 머리는 ‘교만은 지옥의 문, 지옥의 저주’라고 했습니다. 사단이 지옥의 문을 열었다면, 예수님은 겸손으로써 천국의 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처벌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두더지 게임처럼 우리가 교만으로 고개를 들 때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머리를 맞지 않으려면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처벌을 피하기 위해, 또는 보상심리 때문에 겸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히 채워질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왜 겸손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17).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영광을 지니신 분이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입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쳐다볼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천지만물과 그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노래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눈을 돌려 그 하나님이 어찌하여 자신을 돌아보시는가에 대해 의아해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안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볼 때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욕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21-24).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높으신 권세를 가지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로 오셔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은 가장 위대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이 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분의 겸손을 본받아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나 자신을 제대로 안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1:23-25).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룬 업적이 얼마나 갈까요. 저는 졸업장을 받을 때 참 뿌듯하고 기뻤지만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뭔가 대단히 남을 만한 업적도 시간이 흘러 세대가 지나면 별 것 아닌 것이 됩니다. 세상 누구보다 많은 업적을 남기도 가장 높은 지위와 영예, 지혜를 지녔던 솔로몬도 삶을 돌아볼 때 헛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 창조주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주기도 하고 취하기도 하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주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고전 4:7)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더 내세우고 자랑할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고 주님이 허락한 것이라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훌륭해도 구원받은 죄인이다'(앤드류 머리).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안다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교만해질까요? 이 세 가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잊어버리고, 그리스도가 하신 위대한 겸손을 잊어버리며,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먼지 같은 존재인지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나님의 전능하심, 돌보심에 대해 말하면서 겸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겸손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참된 믿음은 겸손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십니까? 네,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터무니 없지만 우리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이 더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두렵고 걱정될 수 있으나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한다면 염려와 걱정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걱정, 염려, 두려움 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겠다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겸손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칭찬하셨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께 ‘주님이 저희 집에 오시는 것을 제가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이 그 사람의 믿음이 크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이방여인이었는데 자녀의 떡을 취해 개에게 줌이 합당치 않다고 하셨을 때 그녀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겸손을 보시고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믿음의 본질이 이와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만이 할 수 있다는 겸손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염려하지 마라 전능하신 그분이 너희를 돌보실 것이다’는 고난 중에 있던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더욱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염려와 걱정이라는 것은 또 다른 모습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평강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와 겸손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눈에 아빠는 슈퍼맨으로 보입니다. 불가능한 일도 척척 해내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이의 눈으로 볼 때 아빠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아이는 자신의 무능력을 알고 아빠의 대단함을 알기에 아빠를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런 믿음, 순종하는 믿음,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는 하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온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셨고 말씀으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들풀을 입히시고 날아가는 새도 먹이시는 분입니다. 온 우주를 궤도에 맞게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분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내어주실 정도로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히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하고 선하신 분이 계신데 걱정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성도가 서로를 대할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종처럼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의 근심과 걱정을 내어버리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겸손을 항상 여러분의 몸을 덮는 의복으로 삼고, 허리를 조르는 허리띠로 삼으라. 오직 겸손의 정신으로 숨을 쉬라. 겸손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라. 겸손의 귀로만 들으라. 그러면 교회 안에 있든지 교회 밖에 있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 소리를 듣든지, 아니면 사람들이나 세상에게서 욕을 듣든지,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믿음을 세워 주는 것이 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서 앞을 향하여 전진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앤드류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