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죽음을 뛰어넘는 기쁨의 이유
본문 : 빌립보서 1:19-26
설교자 : 조 정 의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의 이유에 대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러한 기쁨의 이유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감옥에 있었고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그러면 무엇이냐”,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본문 말씀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19절의 마지막에 “아는 고로”라는 말은 “알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바로 앞의 18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19). 어떤 사람은 좋은 뜻으로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 상황,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모든 상황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알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감옥에서의 석방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이나 우리말성경을 보면 그렇게 해석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원’은 석방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영화롭게 되는 구원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이 석방되게 한다고 해석할 수 없고,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전체적인 관심은 ‘영원한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6),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10). 또한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관계없다고 말했고, 23절에서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19절에서의 구원은 단지 석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환경을 통해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 나를 허물없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주심을 통해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므로”(흠정역)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19절).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2가지 도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고 또 하나는 “성도들의 간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실 때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고, 그가 예수님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런 부족함 없이, 어떤 거짓도 오류도 없이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도 바울을 진리 가운데 이끄시는 인도자로서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선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또한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가 육체의 썩어짐에서 벗어나서 흠없는 양자로 서게 될 것을 간절히 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약속에 따라, 그 일을 위해 성령님을 보내셨고, 부르신 자를 영화롭게 할 때까지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성령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또 하나의 도구는 “성도의 간구”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뿐만 아니라 골로새 교회에도 편지를 썼는데 다음과 같이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 이와 같은 기도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를 둘러싸던 시위대와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 때문에 형제들 중 다수가 담대히 전파함으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의 기도가 실제로 이뤄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그 기도를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통해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바라봐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자신의 뜻에 따라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인해서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성도의 간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바울 스스로도 그렇게 구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20절). 사도 바울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머리를 돌리고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지켜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경주자로 비유하면서 부르심의 푯대를 향하여 달린다고 말했습니다. 달리는 자는 관중을 보면서 뛰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봤던 것이 바로 그의 ‘구원’입니다. 또한 “소망”이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확신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는 구원에 대해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20절). 또한 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담대하게 서게 될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으며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들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는 롬 9:33에서 이사야 28:16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11)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 비난과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자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전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우리들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가이사 앞에 서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20).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엎드려 영원한 형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없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 뿐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로 부끄럽지 않고 담대하게 서게 하시리라는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20절). 그는 살든지 죽든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관계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존귀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기뻐하고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 어젯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저에게 두려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내가 성도님들께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 구절이 “사도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숭고하고 중대한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유익하다’는 말은 ‘오히려 나에게 있어서 얻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것이며, 모든 신령한 하늘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도 바울이 기뻐할 이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 4장을 보면 그에게 있어서 삶은 매일 날마다 조금씩 더 그리스도를 얻는 삶입니다. 조금 더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소유하는 삶이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날마다 내려놓고 포기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 외에 기쁨의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삶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것들도 내려놓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것들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삶은 나에게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내가 날마다 그분을 더 온전히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죽음은 나에게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내가 마침내 그분을 소유하고 영원히 누리는 것이다.”(알렉 모티어).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22절). 사도 바울은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보다 먼저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성도에게 유익이 된다는 점에서 유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다는 것, 나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고 영광 받는 것을 생각할 때 참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23절). 간절히 사랑하고 얻기 원했던 그리스도를 마침내 소유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 둘 사이에 끼었다고 말합니다. 뭘 결정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절). 결국 그는 사는 것을 택합니다. 그것이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5~26절은 그 선택의 이유를 말합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5-26절). 그가 확실히 안다는 것이, 곧 석방될 것을 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았을 때 성도들에게 유익할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살았을 때 유익이 될 것은 “믿음의 진보”와 “믿음 안의 기쁨”, 그리고 “성도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지 않고 성도들과 함께 한다면 여러 말들로 성도들을 권면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이 ‘진보’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음과 동시에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는데 과연 기쁠까요? 믿음의 진보가 있다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의 ‘자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랑을 말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주님께서 이루실 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서 그들과 함께 있다면 그것들이 더욱 풍성하게 넘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는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 비유하시면서, 천국은 밭에 숨긴 보화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판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 보물의 가치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분명해집니다. 보물은 모든 것을 팔아도 될 만큼 가치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고 죽을 수 없는 이유는 그만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조금씩 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 동시에 날마다 다른 것들을 버려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면 안 돼, 언젠가는 달라질꺼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짐과 기대를 늘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러한 다짐은 몇 십 년 뒤에도 그저 각오와 다짐으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21절과 같은 고백,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