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 앞에 큰 자
본문 : 누가복음 1:13~17
설교자 : 최  종  혁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천사 가브리엘은 세례 요한에 대해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15)라고 말합니다. “큰 자”는 일반적으로 ‘위대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한 사람일까요? 세상에서 성공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큰 집, 비싼 차, 입는 옷 등의 재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권력, 영향력 등의 명예를 성공의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잘 꾸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을 성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때는 큰 업적을 세우거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볼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세례 요한의 위대함과 그 이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 그 절정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탄생이었습니다. 그의 탄생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6:16).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은혜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 메시야를 지목했던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구약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를 멀리서 바라보고 궁금해 했습니다. 그 메시야를 연구하고 전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연구하고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러한 구약의 선지자 중 하나로서 특별히 메시야를 직접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며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아이가 태어날 것에 대해 말하면서 그 이름도 정해줍니다(13). “요한”이라는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입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14). 요한의 탄생은 자녀가 없던 사가랴에게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면서, 한 작고 평범한 제사장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기뻐할 일인데 천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14). 사가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이웃과 친족이 모두 기뻐했을 것입니다(58).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는 기쁨 이상의 기쁨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것은 구원과 관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특별히 누가복음 15장에는 회개하는 자들에 대한 기쁨을 여러 차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양을 잃은 목자의 비유,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의 비유, 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다시 찾은 기쁨, 즉 구원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가랴에게 천사가 말하는 기쁨도 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무릎을 꿇게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을 메시야 앞에 나오게 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께 나왔고 참된 기쁨을 찾았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15). 그의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크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시 48:1; 86:10; 135:5; 145:3). 이어지는 32절에서 천사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큰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은 “주 앞에 큰 자”이고 예수님은 그저 “큰 자”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한 인간로서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의 말처럼 요한이 큰 자가 되었을까요?

그의 사역에 대해 성경에 많은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께서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 7:24-28).

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구약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300년을 동행했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으로 당대에 완전한 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멸망당했는데 그와 그의 가족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얼마나 큰 자입니까?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들을 바치기까지 했던, 하나님이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던 사람입니다(창 17).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였고 영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했을 때 그들을 쓸어버리고 너(모세)를 통해 다시 민족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솔로몬은 지혜와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약의 이 모든 위대했던 사람들보다 세례 요한이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는 어떤 점에서 그렇게 큰 자, 위대한 자였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요한이 ‘큰 자’인 이유는 그의 구별된 삶과 특별한 사역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15). 천사는 구별된 삶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술만이 아니라 포도 과즙으로 얻는 모든 음료를 말합니다. 당시는 발효시켜 먹는 것이 오래 가기 때문에 술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취하지 않기 위해 물에 섞어 먹기도 했습니다. “독한 술”은 포도 열매가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얻어낸 술을 말합니다. 이러한 술들의 목적은 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로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세례 요한이 절대로 이러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이중 부정). 포도주와 독한 술은 삶을 즐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금지되었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레 10:8-9).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일할 때 절대 포도주를 먹지 못했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잠 31:4).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독한 술을 마시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술을 마시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실인들도 그러했습니다. 나실인이라는 것은 삼손이나 사무엘처럼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정 기간 동안 나실인의 서약을 하고 그 기간에 자신을 구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한 나실인도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민 6:1-4).

세례 요한은 그러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절제하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은 사람들이 “너의 말이 귀신들렸다 하니”라고 할 정도였습니다(눅 7:33). 요한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내면에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귀신이 함께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요한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의 말씀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태중의 요한이 기쁨으로 뛰어놀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41,44). 그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고 은혜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말은 많이들 오해하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의 통제를 받는 삶’을 말합니다. 두려움에 가득차거나 분노에 가득차는 것, 그래서 두려움과 분노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술이 가득차면 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잠시 동안 특정 사람에게 성령으로 임하셔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님이 통제하고 일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이적들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통해 죄인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16). 요한이 그 삶 전체를 통해 한 일은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이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 회개하게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사역이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의 삶을 통해 많은 이들이 그렇게 회개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4-5).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은 선지자들은 누구나 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경우는 무엇이 특별했을까요?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17). 엘리야는 선지자의 전형입니다. 강하고 용감하고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엘리야의 모습을 닮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외모부터 그렇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 3:4).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왕하 1:8). 또한 엘리야와 같이 세례 요한 역시 타협하지 않고 불의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마 14:4). 헤롯 안디바가 아내를 취했는데 그녀는 이복동생의 아들이었고 동시에 다른 이복동생의 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취해서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왕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한 것에 대해 말했던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말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하나님의 이 마지막 예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 엘리야가 언제 오려나 늘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가 와야 메시야가 올 것이고, 그래야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였고 예수님이 메시야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속된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와서 구별된 삶을 살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17). 요한이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서 했던 일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야가 왔을 때 그에게 돌아올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깨어진 가족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었고, 교만함을 버리고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요한의 모든 사역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구자’는 앞에서 말을 모는 사람, 말을 탄 행렬에서 맨 앞에 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구자가 하는 역할은 자신의 뒤에 오는 왕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결코 자신을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이상의 무엇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운 빠지는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늘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높이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26-30). 이것이 세례 요한이 자신의 사역을 바라보던 시선이었습니다.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는 것, 구원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침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 10:40-42).

아버지인 사가랴는 어땠을까요? 그는 천사의 말을 잘 이해했을까요? 이제 사가랴가 드린 찬송을 보겠습니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76-79). 사가랴는 이 아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와서 길을 예배할 자였고,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역에 있어서 누구도 갖지 못한 특권을 가졌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멀리서 바라보고 연구하며 예언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에게 없던 큰 특권을 요한이 가졌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특권을 오용하지 않고 감사하며 충실히 일했습니다. 그런 그에 대해 하나님은 “주 앞에 큰 자”라고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주 앞에 큰 자”라고 평가하셨고,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는 다릅니다. 광야에서 생활했던 그에게 큰 집이 있었을 리 없습니다. 화려한 옷도 다채로운 음식도, 어떤 재물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정치적인 높은 자리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사가랴를 따라 제사장이 되었다면 존경받았을지 모르지만 요한은 제사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보냈습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요한이 무병장수했을까요? 그는 헤롯에 의해 젊은 나이게 죽임을 당합니다. 헤롯의 딸 헤로디아가 춤을 추자 왕은 즐거운 나머지 딸에게 상으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줍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사람입니다. 무엇하나 누리고 남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성공한 사람’, ‘위대한 자’, ‘큰 자’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별된 삶을 살았고, 삶과 입술을 통해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삶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지가 중요했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일에 기쁨과 순종으로 반응했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는 것이 기쁨이었고 삶의 목표였습니다.

지금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떨까요? 요한과 무엇이 다를까요? 요한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던 것처럼 믿는 자에게도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삶과 사역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입니다. 요한이 ‘큰 자’라고 평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하나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입니까?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위해 산다면 세상에서는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 앞에서 큰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