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제자들의 기도
본문 : 누가복음 11장 1~4절
설교자 : 최종혁

누가복음의 시작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말씀을 자주 접했습니다. 하지만 중반부로 오면서 예수님의 관심이 제자들에게로 좀 더 집중되면서 동시에 저자인 누가도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룹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제자가 된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것을 ‘제자도’라고 말하는데, 제자도에 있어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11장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제자들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의 기도가 주어진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1절) 장소나 때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기도하시고” –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습관적으로도 기도하셨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침례 받으셨을 때(눅 3:21),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눅 6:12), 제자들에게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눅 9:18), 변화산에서(눅 28~29), 십자가를 앞두시고(눅 22:41, 44) 기도하셨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가르쳐 주옵소서” – 제자가 스승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언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요청에 응답하셔서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어떤 기도를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을 따라 자주 금식하고 기도했던 것은 알 수 있습니다(눅 5:33). 여기 제자들의 말을 보면 요한이 구체적으로 그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가르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고, 그래서 그 기도를 통해 누구에게 속한 제자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들만의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마침 예수님께서 기도하시자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제자들이 원했던 것은 그들만의 특별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하실 수 없는 기도입니다. 죄에 대한 기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제자들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기도를 가르치시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기도의 태도(간절함)와 약속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2절) “기도할 때”는 기도할 때 마다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기도할 때마다 반복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는 이런 방법으로, 이런 식으로라는 의미입니다. 글자, 단어를 그대로 반복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 언제나 이것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했던 기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는 아주 짧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예를 보여주신 것이지 우리가 그대로 따라해야 할 기도문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 기도에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생각하고 적용해야 할 기도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자들의 기도에서 배울 수 있는 기도에 대한 많은 교훈들이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나의 필요를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생각하라’, ‘육적인 필요 뿐아니라 영적인 필요에 대해서 생각하라’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지만, 오늘이 본문에서 기도의 두 기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두 기초가 기도의 내용 뿐 아니라, 기도의 이유, 그리고 기도의 정의도 결정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크게 하나님에 대한 부분과 우리에 대한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기도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바로 아는 것에서 우리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아버지이시고 거룩하시고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의존적이고 죄인이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1. 하나님

시작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의미가 개인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친밀함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특히, 아무런 수식어 없이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개인적으로 부르는 것은 이례적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경우들이 많지는 않지만 종종 있습니다(신 32:6; 사 63:16; 사 64:8).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혹은 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고, 생명을 거둬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마 6:26),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마 10:29).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나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이 유일한 예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 대해서도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아버지는 좀 더 좁은 의미이고,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가족의 의미에서 아버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되었습니다.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즉 구원 받은 자들은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런 친밀한 관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많은 호칭 중 특별히 여기서 아버지를 언급하시며 그렇게 부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마 6:26). 우리를 아신다는 의미입니다(마 10:29~30).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세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말은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는 말입니다(마 7:11). 권위적이고 자녀를 자신의 도구로 생각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녀를 정말로 사랑하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바로 이런 아버지 앞에 자녀로서 나가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 이름이 참 거룩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속성, 그 속성에 따라 하신 일들이 들어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평판입니다. 조금 더 나가면 하나님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사 52:6)”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어떻게 드러나느냐와 관련되어 자주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에 의해 높임을 받기도 하고 더렵혀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을 더 거룩하게 하거나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이 땅 가운데 나타내시고 또한 그렇게 해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거룩에 대해 우리는 도덕적인 부분을 가장 먼저 생각하지만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거룩은 분리(구분)입니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거룩’하다고 했는데 어떤 물건이 다른 물건보다 도덕적으로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의 거룩은 분리나 구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거룩은 좁은 의미에서는 도덕적으로 분리된 것, 즉 죄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다른 분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많은 존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신, 구분되신 분으로서 인정받고 그렇게 높임 받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이사야가 봤던 환상에서 천사들이 찬양 했던 것처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고 모두가 고백하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2:28)란 예수님의 기도와 같은 기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해서 그분의 거룩하심이 훼손되거나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신, 다른 모든 것과는 구분되시는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C. 하나님은 주권자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금 이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이 더욱 인정되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구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서 시작될 것을 기대하는 기도이기도 하고, 지금 영적을 계속해서 그 나라가 확장되어 가기를 구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기도의 내용 중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살펴봤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기 때문에 아버지라 부르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고, 왕이시기 때문에 그 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럼, 위에 언급한 세 가지 하나님의 속성은 어떤 면에서 우리 기도의 기초가 될까요? 기도에 있어 하나님의 이 속성들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히 돌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는 것과 잘 모르는 어른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은 확연히 다릅니다. 잘 모르는 어른의 입장에서는 이 애가 왜 나한테 이럴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라면 그 아이의 요청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거룩하시지 않고 다른 여느 피조물 중의 하나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무언가를 구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꼭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왕이 아니시라면 어떨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고 싶어 하시고 돌볼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실제로 돌볼 권리가 없을지 모릅니다. 더 높은 존재의 허락을 받아야만 우리의 기도를 들어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원하시면 언제든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능력의 왕이신 하나님은 그 자녀를 돌보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으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확신 가운데 나가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능력과 권세가 있으시면서 자녀를 돌보신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필요 없을 만큼 아무런 문제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면 그렇습니다. 마치 세계 최고의 갑부에게 최고의 자선 사업가는 별 의미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 없을 만큼 아무런 문제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자들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자들입니다.

2. 우리

A. 우리는 의존적이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3절)

예수님은 먼저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날마다 구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리 와 닿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날 먹을 것뿐 아니라, 앞으로 한참을 더 먹을 것을 우리는 쌓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돈만 있으면 마트에 가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정말 그날 먹을 것을 위해 일했고 그날 일한 것을 가지고 먹었습니다. 오늘 배불리 먹었다고 해도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걱정을 가지고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걱정 대신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하고는 크게 상관없는 기도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육적인 혹은 물질적인 필요를 위해서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그런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돈 벌어서 내가 필요한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하나님께로 온 것들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필요를 생각해 보십시오. 공기와 물은 어디서 옵니까?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면, 동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얻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서 이미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육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먹이실 때, 하나님은 만나를 매일매일 필요한 만큼만 내리셨습니다. 광야에서 양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매일을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런 필요를 생각하며 날마다 혹은 매순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해야 합니다.

B.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4절)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기도를 구원을 얻는 죄사함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 모두를 먼저 용서해야만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이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들, 구원 받은 자들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큰 용서를 받은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을 또한 용서하는 자들입니다. 용서 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매일 범하는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 대해서 이미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여전히 삶에 있어 죄의 문제가 있고 죄와 싸웁니다(요일 1:8-2:1; 롬 7:15-25).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 삶에 있는 죄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 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 문제를 가져옵니다.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친밀함은 끊어집니다. 그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C. 우리는 연약하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끝으로 예수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말 것에 대해서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분이십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고 유혹하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우리를 그렇게 유혹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강하고 지혜롭습니다. 만약 일대일로 사탄과 우리가 싸운다면 우리는 100번 싸워 100번 패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쟁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합니다.

다시 한 번,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 같은 능력도 없고 권위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해야만 합니다. 기도가 바로 우리가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도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두 개의 기초, 혹은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왕이시며 자녀를 돌보는 아버지시고,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하나님에게 의존해야 하는 자녀입니다. 저는 이 두 기초가 기도의 내용, 기도의 이유, 기도의 정의를 결정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내용에 기초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본문의 내용이 해당되고, 그 외에 다른 것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도 포함될 것입니다. 직장을 위한 기도, 배우자를 위한 기도 등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들, 내가 걱정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왕이시며 자녀를 돌보시고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면, 이제 답은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도의 두 기초 중 최소한 하나를 부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부인하고 있거나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충분한 자들이 아닙니다. 혹시 기도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전능하신 왕이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그저 하소연이 아닙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효과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슨 마법 주문 같은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갈 때 그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것이 기도일까요? 기도입니다. 스스로가 구원할 힘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한 것도 기도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이 기도가 바로 여러분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볼 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능력 많은 사랑의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