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자기 백성을 돌보신 하나님
본문 : 누가복음 7장 11~17절
설교자 : 조정의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누가복음이 33번째 시간입니다. 처음에 시작하면서 매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해 듣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예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긍휼이 넘치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다윗은 시편 145편 9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긍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마음, 필요를 돌보시고자 하는 마음을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나인성 과부에게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은혜를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가 베푸신 긍휼과 은혜를 생각해보고 그 행하신 일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1절부터 12절까지에 배경이 등장합니다.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습니다. 그 사건이 있었던 곳이 가버나움입니다. 이제는 며칠 지나지 않아 나인성으로 이동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30-40킬로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약 하룻길 정도의 거리입니다. 지금도 나인성이 존재하고 있는데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인구가 200명 정도 되는,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기드온과 미디안 군대가 진을 쳤던 모레 산이 있는 곳입니다. 건너편엔 수넴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외아들을 살린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그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항상 따라다녔던 이들입니다(6:17). 12절의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에는 현재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원래 성경에선 “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 안으로 들어가실 때에 “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 죽은 자가 실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장례 문화를 보면, 당시에는 시신을 오래 보관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 두면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고 나면 하루를 넘기지 않고 바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청년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향품을 넣고 송진에 담가둔 긴 세마포로 시신을 싸맨 상태입니다. 관에 갇혀 있는 시신이 아니라 널판 위에 실려 있는,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시신을 본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례 행렬은 성 밖으로 나가 동굴 무덤에 시신을 안치시킵니다.

예수님은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시신은 성 밖으로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신 옆에는 그들의 가족이 나옵니다.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이에 대해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는 꾸밈없이 간단한 문장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슬픔이 나타나 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하나 뿐인 아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과부라는 말의 뜻은 ‘버림받았다’입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룻과 나오미처럼 구걸하며 살아가는 입장이 됩니다. 홀로 남겨진 자로서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통곡하고, 굵은 베 옷을 허리에 두르고 잿더미 속에서 뒹굴면서 통곡하고 슬피 울부짖어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저 역시 지난 한 해 동안 가족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할수록 그런 슬픔이 너무나 커졌습니다. 나는 이 집에서 이 환경에서 그대로 살 수 있을까 생각할 때 너무나 큰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죽음은 이런 큰 슬픔을 가져옵니다.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지만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남편이나 아내를 잃은 분들, 자녀를 잃은 분들이 있다면 얼마나 마음에 고통이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을 철저히 무능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누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죽음이 우리를 부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통곡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이 죄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 라일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진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세상에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질병과 고통, 약함, 가난, 수고, 그리고 어려움이 도처에 쌓여 있다. 또 세상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살펴볼 때 모든 인간의 가정의 역사는 항상 애통과 슬픔, 그리고 통곡과 비애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죄는 마땅히 추적해 보아야 될 원천이며 또한 뿌리라고 볼 수 있다. 만일에 이 땅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눈물이나 다툼, 그리고 질병이나 사망, 또 장례식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는 선포 이후 죽음은 모든 인류가 가진 운명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존재합니다.

과부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었습니다. 큰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차 사람들의 위로에도 위로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죽은 사람, 과부,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장례문화는 피리와 징을 치고 전문적으로 곡을 하는 사람들이 우는 소리를 내어주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마음껏 울 수 있게 했습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과부는 슬피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긍휼을 베푸셨던 배경이 되는 장면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13-14절을 통해 예수님을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인지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누가는 이 부분에 예수님을 “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과부를 직접 눈으로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장례식장에서도 우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죽음 앞에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그 죄의 저주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우셨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길에서 죽어가는 자를 보고 느낀 동정심과 같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측은히 여겨 달려갔던 그 마음과 같습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말이 성경에 자주 나오지 않는데, 이것은 내장이 쓰리고 아픈 것을 가리킵니다. 여인의 슬픔에 대해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도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예언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에게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따르던 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인데도 그들 중 어떤 사람도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에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과부에게 했던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위로와 달랐습니다. 그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말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죽음 앞에 무능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지 않을 수 있는 이유, 근거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여인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여인에게 주시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이것이 예수님의 긍휼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시체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유대인들의 규례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시체에 놓인 널판을 누군가가 만졌다면 사람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려고 하는가하며 제자들과 사람들의 이목이 여기에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만 살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여인의 마음을 살피시고 위로하셨습니다.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위로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런 위로와 긍휼의 하나님이 그녀를 위로하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십니다.

14-15절에서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 수넴지역 근처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사람을 살린 적이 있는 곳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여러 차례 특정행동을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살려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5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와 힘이 있었습니다. 죽음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죽음이 자신의 먹이로 사로잡은 것을 예수께서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어떤 주석가는 말했습니다.

그 결과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일어났다는 것은 의학전문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굳어진 몸의 모든 기관이 생명력 있게 작동하고 뇌가 살아났으며 몸의 모든 마디마디, 근육과 뼈가 움직였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몸을 만져보았는데 너무나 딱딱했습니다. 이 청년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청년의 몸에 생기가 돌아 살아난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생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은 말을 했습니다. 급하게 사람을 살리면 말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청년은 즉시 일어났고 바로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엘리사가 살린 아이는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서서히 따뜻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청년은 바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음으로 완전히 끊어진 모자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경험을 한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들것에 실려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만지시고 붙잡아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단절되었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돌려진바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을 맛본 자들입니다.

이제 16-17절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여러분은 이런 광경을 보셨습니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놀랍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특히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서 큰일을 하셨을 때 사용합니다. 그들은 큰 선지자가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야라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약속하신 그 메시야라고는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시편 8편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돌보시냐는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또한 사가랴의 예언이 생각나게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구원하시며”(눅 1:68)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져, 마케루스 요새에 갇힌 세례 요한에게까지 들리게 됩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이 분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슬퍼하는 여인에게 위로를 주셨던,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가진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인가 엘리야인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분은 바로 메시야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가족의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권능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 마음이 슬픔으로 젖어갈 때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을 버리십시오. ‘예수님이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시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걱정하지 마시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신 분은 오늘 들은 말씀처럼 예수님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믿으시고 그 긍휼과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어려움과 슬픔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매일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 드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