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본문: 누가복음 22장 14~20절
설교자: 조정의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기념할 수 있는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형식만 보면 이전에 없었던 특별한 예식은 아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지켜온 유월절 예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약 1,500여 동안 유월절 예식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양을 먹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예수님은 이날 밤 그 희생양이 가리키는 실체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십니다.

니산월 14일 목요일 저녁, 유월절 식사 이후 유월절의 의미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워진 의미를 가지고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주님이 명령하신 이 예식을 통해 주님을 기념합니다(고전 11:26).

주님이 열두 제자와 함께 나눴던 첫 만찬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예수님은 이 만찬을 통해 무엇을 기념하기 원하셨는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기억하며 이 특별한 예식을 매주 행할 때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잘 기념하기 원합니다.

14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때가 이르렀습니다. 유월절 당일인 니산월 14일 목요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먼저 보낸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 말씀에 따라 준비한 큰 다락방에 가셨습니다. 열두 사도가 함께 모였습니다.

큰 식탁을 가운데 두고 U자 형태로 앉을 수 있도록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을 표현하도록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행해졌습니다. 식탁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준비한 구운 양고기와 쓴 나물 그리고 무교병, 음료로 마실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막 14:16).

양고기에 대해 잠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정육점에 가서 포장된 고기를 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월절 당일 오후 3시경 성전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리면 각 가정의 대표가 성전으로 살아 있는 양(1년된 수컷)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스윈돌, 594). 성전 안에서 각각 양을 도살하고, 그 껍질을 벗기고, 대접에 피를 받으면, 제사장이 그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출 24:6). 

그리고 양의 기름과 콩팥은 제단 위에 태우고, 남은 고기를 가져와 집에서 구운 것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의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는데, 하나는 양이 대신 피를 흘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는 최소 10명의 가족을 대신했는데, 가족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먹고 있는 양이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문 밖에 발라져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양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름과 콩팥이 제단 위에 태워지는 것, 남은 음식을 제사드린 이가 가져가는 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화목제와 유사합니다(출 29; 레 3). 화목제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친밀한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와 함께 자리에 앉아 대속과 화목을 상징하는 양고기, 그리고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을 기억하게 하는 쓴 나물과 급하게 애굽을 빠져나가기 위해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무교병, 그리고 물을 섞은 포도주로 유월절 식사를 함께하셨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일몰 이후(‘저물매’, 막 14:17)에 시작하여 한밤 중이 되기 전에 마쳐야 했습니다(오스본, 792).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 유월절 식사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장례식 분위기가 아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형식도 없는 식사는 아니었습니다. 

총 네 번의 포도주를 먹는 예식으로 이루어진 식사였습니다. 유대인의 구전된 율법이 기록된 미쉬나에 따르면(Pesahim 10), 유월절 식사는 의식용 등잔에 불을 붙임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축도와 함께 첫 번째 잔을 마십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습니다. 빵을 가지고 축사하고, 떼어 나눠주고, 쓴 나물과 함께 과일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습니다.

두 번째 잔을 물과 섞을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오늘 저녁은 왜 다른 저녁과 다른가요?”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과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설명하고, 미래에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베푸실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할렐이라 불리는 시편 113~114편의 첫 부분으로 노래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잔을 마십니다. 다시 식사가 시작됩니다.

식사 끝 무렵에 세 번째 잔으로 축사하는데, 시편 115~118편의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잔을 마시면서 모임을 끝마칩니다.

17절에 나오는 “잔”이 식사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잔이고, 20절의 “잔”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마시는 세 번째 잔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기다려온 바로 그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 자신을 통해 곧 이루어질 것을 이 유월절 식사를 통해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유월절 식사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셨던 세 가지 내용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우리가 오늘날 주의 만찬을 행할 때 기억해야 할 세 가지 내용이기도 합니다.

1. 소망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그 날을 소망하라(15-18)

15절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첫 번째로 예수님은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식사하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원하고 원하였다”, 반복). 

그 이유는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잡히시고, 밤새도록 심문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잠시 그들과 함께하시겠지만, 곧 승천하셔서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었습니다. 다음 해 유월절에 예수님은 그들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식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유월절 식사는 그들과 함께 할 마지막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첫 번째 잔을 가지고 감사 기도 하실 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17절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이 건네 준 포도주를 제자들이 서로 나누어 마실 때 예수님은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나실인이 하나님께 삶을 바치겠다는 서원의 의미로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역시 강력한 의지가 담긴 일종의 서원 혹은 약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나무에서 난 어떤 것도 마시지 않겠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마신 장면을 보고 예수님이 약속을 어기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요 19:30). 어떤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과 음식을 먹게 된 경우 포도주는 입에 대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눅 24:41). 모두 본문을 오해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이 강력한 서원을 하신 목적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제자들과 함께 마실 그날을 갈망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16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넘어가시고 자기와 화목을 이루신 일이 모두 온전히 성취되는 날, 그날이 언제입니까? 18절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과 새로운 포도주로 함께 마실 것입니다(마 26:29; 막 14:25).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나눌 첫 유월절 식사를 기대하십니다. 간절히 바라며 소망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곧 예루살렘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에게 구원의 때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락방에서 권력자들을 피해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의 식탁에서 제자들이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릴 중요한 식사를 함께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주 우리가 기념하는 떡과 잔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피 흘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2천 년 전의 사건만 기억하며 예배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 만찬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만 힘쓴다면, 주의 만찬을 제정할 때 예수님이 강조했던 강력한 소망의 메시지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우리가 받은 사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우리가 현재 씨름하고 있는 문제가 심각할수록, 우리는 온전히 기뻐하며 만찬 예배에 참여하기 힘듭니다.

지금 내가 겪는 슬픔, 내가 받은 깊은 상처, 낙심과 원통한 마음을 아주 오래전에 내가 받은 사랑을 떠올려 기쁨으로 바꾸는 일은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에겐 소망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겪는 슬픔이 모두 기쁨으로 변하게 될 소망의 날, 내가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내가 흘린 눈물이 모두 닦여진다는 소망의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주 나누는 주의 만찬에 바로 그 소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해도 세상을 이기신 주가 곧 그 나라를 가지고 이 땅에 임하셔서 왕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우리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이 주의 만찬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나누는 이 만찬에 예수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다시 만찬을 나눌 그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십니다. 원하고 또 원하십니다. 우리도 그 소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할 그 날을 기다리며 주의 만찬을 행합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주의 만찬을 왕이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고전 11:26).

2.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억하라(19)

19절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두 번째로 예수님은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19절을 보면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십니다. 첫 번째 포도주를 나누고 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떡과 쓴 나물, 양고기 등 준비된 유월절 음식으로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 식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나누어 먹는 떡을 가지고 감사하신 장면입니다.

보통 떡과 음식을 나누면서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과거 하나님이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설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출 12:27).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날을 기대하는 메시지도 이 시간에 선포되었습니다.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의 의미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을 사랑하사 그들을 회복하실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신 뒤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받아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막 14:22).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말합니다(갈 1:4). 

히브리서 기자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히 10:10).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기 위해, 죄인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자리, 죄인의 몸이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에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눠준 떡이 그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무엇으로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확증하셨습니다(롬 5:8, 1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요일 4:10).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자기 몸을 주심으로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의 만찬은 이렇게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떡을 통해 말씀하셨을까요? 어린 양을 가지고 말씀하시면 그림이 더 잘 어울릴것 같은데 말이죠.

두 가지 정도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희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떡을 찢어 나눈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그 몸이 찢기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희생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쓴 편지, 흠정역을 보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고전 11:24).

그러므로 주의 만찬을 기념할 때, 우리는 떡을 떼면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나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시려고 그분의 몸이 우리가 떼는 떡과 같이 찢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몸이 찢어지도록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진지하게 그 의미를 기억하며 떡을 뗀다면, 우리는 일주일 내내 죄를 즐기면서 살다가, 주일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떡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 죄를 대신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이렇게 찢기도록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열두 제자가 한 떡에 참여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떡은 처음에 하나지만 나누어져 여럿에게 돌아갑니다. 떡을 먹는 모든 제자가 예수님이 주신 한 떡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떡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

한 떡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떡에 참여하는 모든 지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임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우리 모든 지체가 함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주 떡을 뗄 때 형제를 시기하는 마음, 자매를 미워하는 마음, 서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떼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원수를 맺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가식적입니까?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요일 4:10). 이것이 떡의 의미이죠. 그리고 나서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매주 떡을 떼면서 우리는 주 안에 한 몸을 이룬, 한 떡에 참여하는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찢는 희생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먼저 보이심으로 시작된 사랑입니다. 

3. 믿음:
예수의 피로 맺어진 영원한 언약을 신뢰하라(20)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마지막 세 번째 메시지는 믿음의 메시지입니다. 저녁 식사를 다 마치고, 세 번째 잔에 포도주를 부으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예수님은 붉은 포도주를 가리켜 ‘자기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의 기록을 보면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8).

붉은 포도주가 흘러 잔에 부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도 제자들을 위해 흘려져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희생양의 피를 요구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을 양이 피를 흘리면, 죄를 진 사람의 죄가 용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었습니다(히 9:22).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바 되었습니다(히 9:28). 죄인을 위해 흘리신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마 26:28; 막 14:24).

무슨 “언약”을 말할까요? 왜 “새 언약”일까요? 

첫 유월절 예식을 애굽에서 드리고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시내 산에 도달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소를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고, 백성은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외칩니다. 모세는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하나님은 희생제물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돌판에 쓴 언약서에 기록된 말씀대로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불순종으로 그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3).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다릅니다. 돌판에 쓴 율법이 아니라 마음 판에 쓴 성령의 법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고후 3: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예수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는 소원을 주시고 그 법에 순종할 능력을 주십니다(빌 2:13).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 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확실한 징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입니다(히 9:15).

유월절 밤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세 번째 잔을 나누실 때, 예수님은 곧 제자들을 위해 흘릴 피가 새언약의 피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매주 주의 만찬을 대할 때, 잔을 마실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확실히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 언약의 고귀한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만큼 보배롭고 가치있는 것이 있을까요?(벧전 1:19) 그 피로 맺어진 언약만큼 변함없이 확실하고 영원한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기업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보십시오(엡 1:18).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롬 8:35)

나의 삶이 불완전하고 연약하여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릴 때, 생활의 염려와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고 넘어질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여겨져 세속적인 삶을 살 때, 이 잔을 앞에 두고 이 믿음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선포하십시오.

내 영혼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1).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시 118:28)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그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기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길 권세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고 알지 못한 일이 없으시며 선하고 인자하신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달음박질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믿는 모든 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롬 9:16). 매 주일 우리가 마시는 잔에 이 믿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벌써 2천 년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지 말입니다. 수천 년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오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떡과 잔을 가지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이것을 행하여” 주님을 기념합니다(19절).

여러분은 왜 “이것을 행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자녀가 왜 주의 만찬을 행하냐고 물었을 때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주를 만나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과 함께 감사와 기쁨의 만찬을 나눌 그 날을 소망합시다.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찢기도록 내어주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사합시다. 우리도 주를 사랑하고 주의 백성을 사랑한다고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의 백성으로 내가 얻게된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신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