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
본문 : 누가복음 4장 14~30절
설교자 : 조정의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동안 우리는 누가복음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 여러 증언들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한 손에는 구원, 한 손에는 심판을 지니신 분이었고, 세례 요한은 그분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는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태어나신 후에는 정결예식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증언했습니다. 12살에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며 지혜가 충만하신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를 증거 했고, 그가 세례를 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으며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입증했습니다. 지난 시간 사탄이 예수님에게 했던 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이었습니다.

본문에 앞서 많은 증언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언해왔는데 이제 드디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특별히 예수님이 어떤 말씀으로 백성들을 가르치셨는지에 주목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설교자임에도 은사가 뛰어난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 힘이 빠집니다. 어떤 사람은 달변가로서 웅변가로서 여러 기교를 사용하여 청중들을 압도합니다. 어떤 탁월한 설교자는 머릿속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말씀이 차곡차곡 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세우셔서 큰 영향력을 끼치셨습니다. 저 역시 그런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수많은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보다 위대한 설교자는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큰 권능으로 위대한 설교를 하셨는지를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셨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14-15).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도 이 사건을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 바로 갈릴리로 가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13절 시험 이후에 1년 동안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하시고 갈릴리로 이동하십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한은 그 1년의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요한이 이것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요 20:31)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시고 다시 침례 받으셨던 베다니로 가십니다(요 1:29-51). 이튿날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증언에 따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더해집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 지역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사역을 하셨고 잠시 가버나움에 머무셨다가 다시 유대지역으로 가시는데, 유월절에는 성전으로 가셔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를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에 계실 때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베다니 지역에서 세례를 베푸시고, 세례 요한은 에논 지역에서 세례를 베풉니다(요3:23). 또 예수님은 베다니 지역을 떠나 가나 지역으로 가셔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배경인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 가십니다. 이 많은 사건들의 기록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4:3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5:1),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5:17),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6:6),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7: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8:1). 이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누가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9장 50절까지 이어지는데 51절에서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작정하십니다. 그 때까지 1년 반 동안 가르치시는 일에 전념하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중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는 것 외에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거나 놀래 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적이 가리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4절을 통해 가르침의 배경이 갈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갈릴리 인구수가 300만 명 정도였고 만 오천 명이 넘는 마을이 204개 있었고 그런 큰 지역에는 회당이 여러 군데 있었을 것입니다. 열 세대가 넘어가면 회당이 있어야 하는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곳에 유대인의 회당은 마을마다 하나씩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회당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회당이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기도하는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포로귀환 이후 그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회당을 지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많은 회당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만 480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이 성전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회당은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회당의 입구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있고 돌기둥이 천장을 바치고 있고 왼쪽으로는 돌 계단식 의자가 있었습니다. 안쪽 뜰에는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벽장에는 두루마리 성경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당에는 전심 사역자들이 없었고,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회당에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배드리는 형식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형식과 비슷합니다. 기도하고 율법서와 선지서를 읽는 낭독이 있었고 설교시간이 있고 축도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작에 앞서 “들으라 이스라엘아 여호와는 한 분이시니 하나님을 너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신명기)를 낭독하였습니다. 회당장이 초청한 강사들이 그 자리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16-30절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백성들의 반응 또한 이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2만 명의 인구가 사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셨던 곳이기에 예수님과 가족들, 친척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고 순서에 따라 예수님 차례가 되어 선지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두루마리를 건네받고 읽으셨는데 그것이 이사야의 글이었습니다. 두루마리 성경은 양쪽으로 말려있는 성경이었습니다. 찾고 싶은 구절이 있다면 한쪽을 펼 때 다른 한쪽을 말아가며 찾아야합니다. 이렇게 찾으신 곳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찾아서 선택하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례 장면입니다. 그 때 주의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했습니다.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당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비로소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헬라어 번역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말씀을 찾으셨고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전 690년, 예수님이 이 글을 읽으신 시점으로부터 700년 이상 된 말씀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의 메시지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러 노래들은 종의 노래였는데 택하신 종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사 42장) 이렇게 하나님의 택한 종에 대한 본문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에 따라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 말씀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택하심과 능력을 받은 종,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를 보내시고 그 때 비로소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절을 찾아서 읽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읽고 덮으셨고 맡은 자에게 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그 칭송이 자자한, 말씀의 대가라는 분의 입술에서 어떤 말씀이 나올까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누가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말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놀랐습니다. 12살에 이미 학자들을 놀라게 할 만한 분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 키와 지혜가 더욱 자랐으므로 더욱 온전한 지혜로 말씀의 참 의미를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이사야 말씀을 보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고 했는데, 여기서 “가난한 자”는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사람입니다. 당시 가난한 자는 할 수 있는 일이 구걸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스스로는 할 수 없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것은 배고픔뿐만 아니라 마음(영혼)이 가난하고 궁핍하고 곤경에 처한 상태, 그것을 깨닫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구원하겠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처한 궁핍함은 포로된 것, 눈먼 것, 억눌린 것 등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이사야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가난한 자로 만들어버리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인류의 가장 큰 위기는 죄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의인은 없다고 했습니다.

죄가 인류를 얼마나 궁핍하고 처절하게 만드는지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3-8)

우리의 모든 지체에서 죄악이 뿜어져 나옵니다. 죄악의 악순환입니다. 죄의 수렁에 빠진 인류의 모습입니다. 죄에 빠져, 억눌린 죄로 인해 눈이 가리어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인류의 헐벗은 상태를 보고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사 59:9-10)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은 죄의 노예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사야는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택한 종, 기름 부으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오신 분이 오시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당시 백성들에게 흔한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했고 백성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면 참된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선지자를 초월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그동안 많은 선지자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었고, 다만 그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이 구원의 메시지가 응답되었다,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밖에는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뛰어난 선지자일 뿐 아니라 이 말씀을 성취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달할 사자가 아니라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권능 있는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충격적인 반응이 등장합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최고의 설교다’, ‘진짜 잘 한다’라고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이셨기에 어떤 설교자보다 뛰어났을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은혜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급격하게 변합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요셉의 아들 아니야?’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진리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저 나사렛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굳어지고 딱딱한 마음, 교만한 마음은 가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의심이 자라납니다. ‘(네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그 증거를 보여 봐라’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그들의 심중을 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있었던 속담으로 의사라면 네 자신을 고쳐서 증명해보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들려온 소문에 따르면 기적을 행한다는데 한 번 보여주고 증명하라’는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사탄이 했던 시험, 내게 증명해보이면 그 때에 믿겠다는 불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살인충동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암흑기였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던 시기이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던 선지자들이 850명이나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죄에 물들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그 시기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죄 때문에 3년 6개월이라는 가뭄을 허락하셨는데 과부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과부들 중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은 과부는 이방 여인, 한 명뿐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진 엘리야가 회개를 요구했을 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약 밖의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고 겸손히 은혜를 구했을 때 그녀에게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멸시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가 이스라엘에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고침 받은 사람이 이방인 나아만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더럽다,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의 적군인 아람 군대의 장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아닌 이방인이자 테러리스트인, 부정하고 더러운 나병환자인 나아만에게 은혜가 임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예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브라함의 자손, 언약의 백성이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가난한 마음을 품는 사람, 겸손히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임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갈릴리 사역 중에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교만함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속으로 나는 죄를 통제할 수도 다스릴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를 맛보고 살다가 심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능이 있고 구원을 이룰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듣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지루해하거나 설교를 판단하거나 유대인들처럼 교만하고 딱딱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내 양심을 찌를 때, 진실을 말해줄 때 그것을 따르겠다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이 내 음성을 듣고,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난 설교는 ‘믿고 순종하겠는가’에 대한 것이었고 오늘의 말씀은 ‘듣고 순종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