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망, 그날을 바라보다

본문 : 로마서 8장 18-25절

설교자 : 이병권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별한 은혜를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도하심을 통해 그분이 기뻐하시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특혜를 받았고 받고 있고 또 받을 것입니다.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과정에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데 바울은 앞서 말했던 고난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초점은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보다는 영광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그 영광스러운 미래가 눈부시게 빛나도록 만드는 어두운 배경과도 같다.’ 현재의 고난을 말하면서 고난을 배경으로 사용합니다. 고난을 어두운 배경으로 사용해서 미래의 영광, 우리의 소망인 눈부시게 밝고 빛나는 그날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상황은 다르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고난이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망은 우리에게 참 위로가 됩니다. 오늘 말씀이 소망으로 그날을 바라보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을 향해 간구했던 기도가 오늘 이 시간 통해 우리에게도 은혜로 응답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분이 우리를 어떤 소망으로 불러 주셨는지 우리가 얼마나 풍성한 영광을 받았는지 알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비가 내리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하더라도 어두운 날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구름 너머에 있는 태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확정된 그날은 변함이 없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날은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해서 그날을 소망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오늘 소망에 대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날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 첫째는 비교불가입니다.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결과는 비교불가라는 결론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생각하다는 말은 계산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계산하는 것은 저울질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무거운지 따지며 비교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기 위해 저울질을 합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측정불가입니다. 웬만큼 무게차이가 있어야 비교를 할 수 있는데 고난과 영광은 그 차이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은 입김만으로도 날아갈 수 있는 티끌같이 가벼운 것이라면 영광은 거센 태풍이 몰아쳐도 꿈쩍하지 않는 태산같이 무거운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면서 고난은 잠시 동안의 가벼운 것으로 말씀하고 영광은 영원하고 지극히 무거운 것으로 말씀합니다(고후4:17). 고난은 가벼울 뿐만 아니라 잠깐입니다. 반면에 영광은 지극히 크고 무거울 뿐만 아니라 영원합니다. 무게에서도 비교불가인데 시간에 있어서도 비교불가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그야말로 비교불가인 것입니다.

만약 그날에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그저 그런 것이라면, 좀 괜찮은 정도의 것이라면, 어느 정도 봐줄만한 그런 정도라면 우리가 진심으로 고난을 감당하기에는 힘겨울 것이고 꺼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망하는 그날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대단한 것이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붙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에게 있는 영광이 이렇게 놀라운 것인데 우리는 왜 영광보다 고난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을까요? 왜 영광을 바라보기보다 고난을 바라볼 때가 더 많을까요?

왜냐하면 고난은 현재이고 영광은 장차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아무리 가볍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반대로 영광은 장차 나타나겠지만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에 더 영향을 받고 고난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비교불가 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고난의 크기가 정말 크다면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은 도대체 얼마나 더 크고 놀라운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영광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고난이라 하더라도 고난을 배경으로 두고 더욱 집중하며 바라봐야 할 것은 고난을 통해 더 밝게 빛나는 영광입니다. 고난은 영광을 빛나게 하는 배경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경험하게 될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날을 더욱 사모하고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도 주님의 선하신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감당하되 고난을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고난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영광을 더욱 분명히 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고 영광을 더욱 분명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장차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안다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께서 고난 뒤에 있는 영광에 이르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고난을 지나서 고난 뒤에 있는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고난을 뚫고 영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소망으로 달려가는 걸음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 아니라 소망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고 더욱 확실하게 만드는 디딤돌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소망의 어떠함을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분해서 언급합니다. 먼저 19절에서 22절까지 피조물의 소망을 말하고 23절에서 25절까지 자녀들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날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 둘째는 학수고대입니다.
학수고대라는 말은 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학수고대가 본문하고 너무 잘 어울리는 말이라 인용합니다.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도 그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고대하다는 단어는 ‘머리’와 ‘보다’는 말이 합쳐진 것인데 뭔가를 보기 위해 목을 펴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학수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피조물을 의인화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들인데 시편은 작은 산과 초장과 골짜기들이 다 즐거이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선지서를 보면 백성들의 죄로 인해 땅이 슬퍼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그날을 피조물들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 진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자녀 됨의 진짜 모습은 그날에 나타날 것이고 피조물들은 그날을 학수고대 합니다. 그러면 피조물이 왜 그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을까요? .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각 절에서 지금 피조물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습니다(20). “허무한 데”라는 말은 ‘공허함, 무익함, 덧없음’을 의미합니다. 칠십인역은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다’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전도서가 이 20절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첫 사람의 범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손들은 물론 모든 피조물들도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굴복하게 하시는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의 결과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21). 피조물은 죽음으로 인한 썩어짐의 사로잡혀 있습니다. 썩어짐에서 헤어 나올 수 없고 썩어짐을 막을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낡아지고 있고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22).여기서 피조물이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은 본문에서 바울이 피조물과 자녀들을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기에 피조물과 우리가 함께 고통을 겪는 것보다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고통을 겪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함께 고통을 겪으며 함께 탄식하며 함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세계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나는 피조물입니다. 생명을 얻어 태어날 때도 고통이 있고 생명을 잃어 죽을 때도 고통이 있습니다. 피조물이 타락한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온통 고통으로 물들어있습니다. 정리하면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 하고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 바라는 것은”(21) 이라고 되어 있는데 바라는 것으로 번역한 단어가 24절에 나오는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있습니다” 피조물에게도 소망이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이 범죄 했던 그 때부터 소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영광으로 나타날 그날이 피조물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그날에 피조물은 허무함에서 충만함으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날에 피조물은 썩어짐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피조물은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그날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리고 피조물뿐만 아니라 우리도 학수고대합니다.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위한 첫 열매로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첫 열매는 추수의 시작으로 완전한 추수가 뒤따를 것을 보증합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완전한 구원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하며 기다립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미 우리는 새 시대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죄와 사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지만 아직 우리는 온전히 양자 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몸의 속량,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완전한 구원을 학수고대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연약함에서 나오는 탄식을 경험합니다. 나의 타락한 본성은, 내 안에 있는 죄성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의 죄성이 사라지고 온전히 자유하게 되는 그날을 갈망합니다. 나의 계속되는 탄식이 끝나고 지금의 연약함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탄식이 있으십니까? 얼마나 탄식하고 계십니까? 내가 얼마나 탄식하는지는 내가 얼마나 나의 죄성으로 괴로워하는지를 반영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탄식하는지는 내가 얼마나 그날을 갈망하고 기다리는지를 반영할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 그날을 나는 얼마나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는지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성에 둔감해질수록 이 땅에서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할수록 그렇게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할수록 내 속에서 나오는 탄식은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려움 없이 거리낌 없이 부담 없이 사는 것은 소망 없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날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 셋째는 현실극복입니다.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표현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 걸까요? 여기 “소망으로”라는 말은 전치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망으로”가 수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망이 구원의 수단이 되어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바울이 구원 얻은 것을 과거시제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죄책과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바울이 바로 앞에서 말한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우리는 구원을 얻었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죄성은 남아있기에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 점에서 소망은 구원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을 기대하며 인내 가운데서 기다릴 필요가 있기에 소망으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여기 전치사는 우리가 얻은 구원의 특징을 소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래의 구원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바라봅니다. 소망으로 그 완전한 구원이 나의 구원이 되고 소망으로 미래의 구원이 나의 삶에 직접적인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의 구원은 우리에게 있어서 과거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원은 계속해서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내 삶을 바꾸고 지금의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현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고 소망이 그 일을 합니다.

만약 그날에 직접 경험하게 될 완전한 구원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로 인한 지금의 기다림과 인내가 없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것을 두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래와 현재의 구원이 없다면 과거의 구원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표현상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으로 나누지만 구원은 그렇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특징은 우리를 소망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날을 바라보게 하고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현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고 현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더 크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볼 때 가볍고 잠깐인 현실의 고난을 극복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갈망할 때 탄식과 고통이 따라오는 현실의 어려움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소망이 우리 삶에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현실극복입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의 완성을 기다립니다.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소망으로 인내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소망으로 그날에 바라보는 자는 참음으로 기다립니다. 그 사람의 삶의 특징으로 인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기다림에 내 예상보다 더 길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소망이 있기에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영광은 보이지 않고 여러 고난들이 계속 나를 흔들고 있다면, 그렇게 나의 삶에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런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입니다. 성령님이 내안에 계십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올 것을 미리 맛본 것과 같습니다. 그 온전한 것이 머지않아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까지 계속해서 내 속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조금씩 더 주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날에 온전한 영광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완전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입니다. 그날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지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 가운데 참음으로 기다립니다.

C.S.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연약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도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불멸의 존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분의 다함이 없는 능력과 즐거움과 선함을 완벽하게 반사하는 티 없이 맑은 거울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 과정은 길며 부분적으로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겠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날에 그분을 온전히 닮은 모습으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니 소망으로 그날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