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소망이 내게 있네

본문: 베드로전서 1장 3~5절

설교자: 이병권

 

올해 마지막으로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하고 내일 하루가 더 지나면 2020년이 끝이 납니다. 예년 같으면 조금 들뜬 마음으로 송년회를 하고 연말 분위기를 느끼며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기대했을 텐데 올해는 그럴 수 없습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우리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지난 주일에 강무웅 부친님이 소천하셨는데 어떠한 종교예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장례였습니다. 코로나가 주는 어려움을 또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는 부친님 발인이라 아침 일찍 장례식장을 가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아주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장례식장으로 가고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이 길을 계속 가면 결국 끝에 이르게 되는 곳이 장례식장이구나, 결국 장례식장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성경은 사람의 생명, 그 인생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그만큼 짧고 순식간에 끝납니다. 마치 안개처럼 말입니다. 모든 인생이 그러합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다되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믿는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겪는 어려움들 우리도 똑같이 겪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이 겪지 않는 어려움까지 겪을 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서 코로나가 피해가거나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죽음이라는 종착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만나게 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우리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것은 그 거대한 장벽 너머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죽음 이후에 진짜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것이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의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어려움, 고난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망이라 부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은 우리의 경쟁력이 됩니다. 소망으로 인해 우리가 세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이 궁금해 할 것입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게 될 것입니다.

소망은 빛과 같아서 주변이 밝을 때는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을 때, 어려움이 없을 때, 삶이 평탄하고 문제가 없을 때 사람들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울 때는 다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소망의 빛은 더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됩니다. 그 빛을 숨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보내는 이 편지의 수신자였던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소망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르게 살았습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삶을 뒤흔들 수 있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건 소망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기뻐할 수 있는 건 소망 때문입니다. 변치 않는 기쁨의 이유가 되는 소망,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살게 하는 소망, 오늘은 그 소망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나에게 있는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을 말하면서 하나의 수식어를 덧붙입니다.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단순히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좋겠다 될 수도 있지만 안 될 수도 있는 그런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가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죽었던 우리가 생명을 얻어 살아났고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거듭남, 그리고 산 소망을 말하면서 이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음,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죄를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살아계심은 베드로에게 삶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베드로의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쓰라린 아픔을 가지고 통곡합니다.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다시 밝아오는 태양도 그에게 소망을 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 문은 열려있었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그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의 소망도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동일한 소망을 가진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남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살아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소망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그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것을 가진 사람과 살아있는 것을 가진 사람 지금 당장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시간이 마감되었을 때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소망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년에도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코로나가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죽음조차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주님은 생생하게 살아계셔서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소망가운데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해서 진짜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소망, 둘째는 “유업”입니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기 말씀에서 유업이라는 것은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장차 받게 될 땅이나 재산, 물질적인 것을 유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유업은 그와 다릅니다. 유업이 있는 곳이 다릅니다. 유업이 있는 곳은 하늘입니다. 베드로는 이 땅에서 얻는 유업이 아니라 하늘에서 얻는 유업을 말합니다. 비록 지금 눈으로 볼 수 없고 지금 얻을 수 없지만, 우리는 하늘에 있는 유업에 대해서 상속자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유업을 우리가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간직하신 것”이라는 말은 완료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 유업을 준비해두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유업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고 그날에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직접 보고 직접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하늘 유업이 어떠한지 그 특징을 보십시오. 세 가지 특징을 말하는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게 될 유업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특별합니다. 그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변합니다.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하여 집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늘 유업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늘 유업을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본적이 없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주어질지 우리 생각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영원한 하늘 유업이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단순히 좋은 느낌이나 기대,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형태가 없는 막연한 것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늘에 존재하고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실체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늘에 있는 유업이 우리에게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을 소망하며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받을 유업이 현실이 되는 곳,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기에 하늘에서 살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삶을 사모하기에, 그 모든 것을 누리고 기뻐할 날을 기대하기에 지금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이 이 땅의 삶을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땅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순식간에 끝나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늘에 속한 유업을 기대하며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일을 했던 인물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마음이 천국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무기력한 삶을 사는 것은 그만큼 천국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바라보고 천국을 위해 살면 이 땅의 삶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을 목표로 삼고 이 땅을 위해 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쉬움과 후회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 유업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하늘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시고 하늘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에게 있는 소망은 “구원”입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베드로는 말세에 얻게 될 구원,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가 디모데후서에서 말세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오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말세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은 똑같이 말세라고 번역되었지만 베드로는 바울이 사용한 단어와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합니다. 기간이 아니라 한 시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세는 마지막 날,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둘 중에 하나의 말세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는 죽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말세를 경험하게 될지 그날이 언제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날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가 말세인 그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 그 구원의 완전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 그 완벽한 구원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로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성과 수많은 유혹들, 타락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넘쳐나는 거짓들 속에서 우리는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에 우리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하고 계시고 또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그 온전한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 때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완벽한 구원을 예비하셔서 그날에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유명한 식당,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사가 있는 식당에 초대가 되었습니다. 식당에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식당을 이용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식당에 내가 갔는데 이미 나를 위한 자리가 예비 되어 있어서 그 예비 된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식사를 한다는 것, 즐거운 일 아닐까요?

예비 되었다는 것은 선물이며 특권입니다. 예비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안심하게 합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고등학생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예비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든든한 회사로 취업할 수 있도록 예비 되었다면, 결혼할 배우자가 예비 되어 있다면, 거할 집이 예비 되었다면 어떨까요? 노년에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이 예비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예비된 미래로 인해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 상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잠시 후에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해 나를 위해 예비 된 그 모든 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그 완벽한 구원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예비하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원을 준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것을 준비해두셨습니다. 그 예비 하신 구원은 안전합니다.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호하고 있기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안전한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소망입니다. 나에게 있는 소망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봤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을 남겨두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 이 소망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상속자가 되게 하셔서 유업을 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심으로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산 소망, 유업, 구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얻은 것이 소망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우리에게 참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을 높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3)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을 말하는 것, 그것이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 같은 자를 위해서 이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하셨습니까? 3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3)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정말로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신 것은 그 많으신 긍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그 자비하심, 그 인자하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그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하셨고, 그 하신 일을 통해 우리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있는 소망으로 인해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기뻐하며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찬송을 통해 그분을 높이며 그분의 어떠하심을 기억하며 그분이 하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소망은 찬송으로 이어지고 찬송은 다시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선한 순환으로 소망과 찬송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우리의 환경이나 상황을 넘어서 우리가 가진 소망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 있는 소망, 그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그분의 어떠하심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소망이 내게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되십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계속해서 이 소망을 붙들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