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불편한 진실

본문: 로마서 1장 18~32절

설교자: 이병권

 

로마서는 성경에서 복음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로마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16절과 17절을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에서 복음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이렇게 편지의 서론이 끝났고 오늘 본문부터 편지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편지의 본론에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나갑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에 앞서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상태를 먼저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3:21)라고 “하나님의 의”를 다시 말하기까지 1:18~3:20에 걸쳐 사람의 어두운 현실과 절망에 관한 긴 이야기를 먼저 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이고 듣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이 정말 좋은 소식이 되려면 먼저 나쁜 소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불편하고 듣기 싫더라도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 그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복음인 것은 우리가 복음이 없으면 안 되는 상황, 우리가 그만큼 절박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복음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우리는 복음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사람의 심각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도박이나 술이나 게임이나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에 중독되었을 때, 그 중독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첫째 단계가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래서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인정하고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사실, 그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영원한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그만큼 무거운 이야기이면서도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왜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이 되는지, 그리고 무거운 또 무서운 이야기가 되는지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이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바르게 반응해야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반론을 가지며 그릇된 반응을 합니다. 대표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의 반응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그릇된 반응, 첫째 ‘하나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람이 분노하는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거칠게 나타나는 분노가 아닙니다.

 

분노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사람도 불의에 대해서 합당한 분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분노는 뭔가 잘못된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패한 사회에서 정의가 무너진 것을 보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악인에 대해서, 흉악한 범죄자에 대해서 분노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 망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정당한 원인이 아니라 잘못된 원인으로 분노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내 욕심을 이루지 못해서, 상대방이 나의 뜻대로 하지 않아서 그래서 화를 내는 겁니다. 나의 악한 본성이 원인이 되어 나오는 분노는 잘못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분노를 잘못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폭력이나 폭언이나 폭발해버리는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나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악한 분노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진노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악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필연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변함없는 사랑의 표현이 진노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진정 사랑하시기에 사람의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본문에서 진노의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 하나님은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올바르고 정당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그릇된 반응, 둘째,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내가 한 일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하나님을 욕하거나 하나님께 피해를 준 일이 없는데 왜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진노합니까! 부당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그 관계에 있어서 책임을 져버리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나라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냐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가족 관계에 따라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무슨 상관이냐고 내 인생, 내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냥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저버리고 살기에 그것이 진노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표현으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져버리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 그렇게 사람이 불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방해하는 것, 그렇게 진리를 막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진리에 대한 그릇된 반응, 그 근본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에서 그릇된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28)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그릇된 반응, 셋째, ‘저는 몰랐어요!’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하나님이 계신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모르고 살던 사람에게 진노하시는 것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이에 대해서 다음의 말씀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자신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술가가 멋진 그림을 그림으로 놀라운 작품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그 작품을 보면서 예술가의 어떠함과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특별한 장소에 가서 멋진 광경을 보면 ‘와! 정말 멋지다!’ 감탄하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그 수많은 피조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능력과 지혜를 생각하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만물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보여주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핑계 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람은 이 진실을 쉽게 외면합니다. 그래서 ‘분명한 진실’이 ‘불편한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분명한 진실을 불편한 진실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합당한 이유가 그러합니다. 사람이 한 일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 말씀에서 진노의 원인이 되는 사람들의 불경건과 불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진노하시는지, 하나님의 진노가 왜 합당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버림”, 다른 말로 “대체”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습니까? 바꾸어 버렸습니다.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이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깁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경배를 다른 대상에게 돌리는 겁니다. 또 무엇을 합니까?

1:26 …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를 바꾸어 버립니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 버립니다.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합니다. 오늘날 특히 더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이러합니다.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둡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욕심을 두고 성적인 쾌락을 두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합니다. 사람마다 예배의 대상이 다를 뿐, 사람은 예배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경우 그 예배의 대상이 우상으로 바뀔 뿐입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형상을 우상으로 섬기지만 더 많은 경우에 그러한 형상보다 다른 것들이 사람들에게 우상이 됩니다. 그것이 돈이 될 수 있고 성공이나 명예가 될 수 있고 쾌락이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혹은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우상에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드려야 할 우리 삶의 예배를 다른 대상에게 빼앗기고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을 향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온전한 예배를 방해하며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쉽게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립니다. 우리도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가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상에 대해서 방심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섬김에 방해하는 요소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결국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두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합니다. 나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욕심이 자리 잡아서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내 삶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일, 그리고 종종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사람들, 불경건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사람의 “바꾸어 버림”에 대해서 하나님은 “내버려 두심”으로 대응하십니다. 내버려 두심은 다른 말로 “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 사람들의 바꾸어 버림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고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시고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내버려 두심”은 소극적인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인 처벌입니다. 하나님은 낙심하시거나 체념하신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그 욕심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마치 부모가 끝까지 고집피우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해봐!’ 자녀는 이 말을 듣고 좋을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좋을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와 후회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려고 애를 쓰고 고집스럽게 원했던 것들, 내 욕심에 사로잡혀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추구했던 것들, 그것을 가져야만 행복할 것 같았고 그래서 그것을 위해 수고했는데 결국은 그러한 욕심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의미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 중심에 계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원하는 것들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늘 더 가지려고 수고 하고 또 다른 무언가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좇을 때 경험하게 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을 때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있는지 보십시오.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을 때 사람이 이르게 되는 곳이 어디입니까? “사형”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그 끝에는 사형, 죽음이 있습니다. 단순히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에게 내버려 두심으로 나타나고 내버려 두심은 결국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진노의 실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바꾸어 버린 것을 다시 바꾸지 않으면, 다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한 죄악에 대해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맹렬한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고통당하는 비참한 상태로 끝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진실입니다. 이 진실을 그냥 흘려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당신의 이야기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움을 깨닫고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시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우상이 있다면 내어 버리고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만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도록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소외되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이 빛을 비추실 때 어둠에서 나아와 진리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믿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당신은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내 입맛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 내 편한대로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고 내 뜻대로 살고 내 욕심대로 살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하나님, 적당히 대충 섬겨도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이해해주시는 하나님, 혹시 그런 하나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이 만든 우상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있는 내가 만든 가짜 하나님, 그 우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당신 마음에 있는 우상을 진짜 하나님으로 바꾸어 버리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되 때로는 엄한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용납하시되 잘못은 꾸짖으시고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죄를 미워하는 거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노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불편한 진실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여러분의 인생을 다르게 만들 것입니다. 진실에 대해서 불편하더라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반응한다면 여러분의 내일은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분명한 진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진실은 나의 모습을 바로 보게 하고 나의 부족함을 바로 알게 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이 결국은 우리에게 행복한 진실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