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마귀와 싸우라

본문 : 베드로전서 5장 8~14절

설교자 : 조정의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8-11절이 중심이 되는 본문이고, 12절부터는 편지의 끝인사입니다.

저는 2000년도에 훈련소에 들어갔는데 여러 훈련을 받는 중에 정신교육이 있었습니다. 정신교육에서는 ‘우리의 주적이 누구냐’라는 것을 묻고 답하게 합니다. 군대에서 주적이 누구일까요? 바로 북한 정권이나 북한군입니다. 훈련소에서 총도 다루고 수류탄도 다루며 전쟁을 실감하지만, 과연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 맞나 생각하게 됩니다. 북한은 실제 존재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북한에 대한 뉴스를 들어도 그냥 그러려니 여기고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주적인 마귀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마귀는 실재하는 존재로서 사납고 위협적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마귀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그를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는 마귀, 사탄의 이름이 30여 번 등장합니다. ‘아바돈’, ‘아볼리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파괴자’라는 의미입니다. 또는 ‘리워야단’이나 ‘벨리알’이라고도 불리고, ‘참소자’, ‘시험하는 자’, ‘거짓의 아비’, ‘살인자’, ‘공중의 권세잡은 자’, ‘뱀’, ‘옛 뱀’이라고도 불립니다(계 9:11, 사 27:1, 고후 6:15, 계 12:10, 마 4:3, 요 8:44, 요 8:44, 엡 2:2, 고후 11:3; 계 12:9).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사단’, ‘마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욥 1:6, 마 13:39). 이 사단에 대해 성경은 우리의 대적, 주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사단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저 악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악한 에너지나 정신적인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사단에 대해 지식, 감정, 의지를 가진 인격체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유혹할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유혹했습니다(마 4:6).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귀신들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믿고 떤다고 말합니다(약 2:19). 귀신들도 이런 감정을 가진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2:31을 보면 사단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청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욥기를 보면 욥을 시험해달라고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과 감정, 의지를 가진 인격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의 대상, 주적은 악한 영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주적 마귀는 분명히 존재하는 인격체입니다.

또한 우리의 대적은 얕잡아 봐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매우 무서운 존재입니다. 베드로서는 이를 “우는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단을 극단적으로 과대평가 하거나 너무나 과소평가 하기도 합니다. 사탄이 영향력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모든 이상한 일들을 마귀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귀의 파괴력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과거에 저희 동네는 개가 많아서 ‘개동네’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송곳니도 크고 키도 큰 개들이 있었는데 길에서 그 개를 만나면 생명의 위협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사파리에서 용맹스럽고 위엄 있는 사자의 모습을 보면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산길을 걷다가 저런 동물이 나타나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자와 일대일로 맞선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위협적이고 사나운 존재입니다. 당시 원형경기장에는 사자들로 죄수들을 잡아 먹게 하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형인 동시에 오락거리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이 형벌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위협적인 사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이런 사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에너지가 넘치고 지치지 않는 동물처럼 두렵게 느껴지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런 마귀의 파괴력이 미치는 세상입니다.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해서 어그러지고 음란하며 죄 많은 세상입니다. 조엘 비키의 Fighting Satan(마귀와 싸우라)라는 책에서 저자는 사자가 왜 무서운 존재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사단은 영적인 존재, 지적인 존재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우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사단은 가룟 유다나 베드로의 마음에 잘못된 생각을 넣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능을 월등히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사단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는 위대한 신학교에서 교육 받았다’(조나단 에드워즈). 사단은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장이었고 월등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항하기도 했던 자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입니까.

또한 사단은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오랜 세월 쌓아온 지혜를 따라가기란 어렵습니다. 사단은 창조 순간부터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많은 경험과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약점이 무엇인지 연구해온 이들이 사단입니다. 인간을 넘어뜨리는 방법과 어떤 미끼를 사용해야 하는 지를 잘 아는 존재입니다.

또한 사단은 지치지 않는 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열정은 지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두 살 아래 아이들을 죽이려고 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혹해 예수님을 배반하게 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계속된 사단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들과 교회를 향한 사단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범죄하고 교회 안에 이단 사상이 들어왔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나태하고 게으른 신앙을 갖도록 했습니다.

또한 사단은 거느리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재하시지만 사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은 장소에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단과 함께 범죄한 수많은 천사들, 즉 귀신들 때문에 사단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단이 사용하는 무기들은 육체의 소욕, 우리의 옛 자아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옛 자아가 그런 것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것보다 내가 내 인생의 유익을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입니다. 사단은 그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외적인 능력 뿐 아니라 우리의 약점을 기가 막히게 사용하는 대적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방법은,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죄가 있고 성도간의 죄가 있으며 세상에서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영적인 훈련을 막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 막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대적 마귀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배드로는 우리의 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대적하라”입니다. “근신하라”와 “깨어라”는 경계에 대한 명령이고, “대적하라”는 방어에 대한 명령입니다. 근신하는 것은 건강한 판단력을 갖는 것, 균형 잡힌 시각, 절제력을 갖는 것입니다. 이는 ‘신중하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또한 “깨어라”는 것은 ‘정신차려라’, ‘항상 준비하라’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토론에서 과거의 신앙인들이 오늘날 사람들의 무엇을 보고 놀랄 것이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평범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구나. 우리는 생명까지 걸고 세상과 분리되어 살았는데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라며 오늘날의 가치관에 대해 놀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얼마 전 저는 미용실 직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구원 받으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구원받았던 과거의 일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냐고 물으니 그분은 “다 아시잖아요?”라고 말하며 처음 신앙이 이제는 식어서 이렇게 그럭저럭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과거에 성경공부하는 일에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소가 부족해 동네 마을의 집까지 구해서 공부를 할 정도였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뜨거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지근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 아는 당연한 걸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가치가 딱 이 정도인 것인가요? 이 정도로 기뻤다가 금세 이 정도로 식을 만한 것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문제입니까, 우리의 문제입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좋은 뭔가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훈련 받는 것에 대해 지쳐 있나요? 아니면 오해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배우고 더 성화되는 일에 관심이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마귀가 오늘날 우리 교회에 해온 일입니다. 메마름과 미지근함을 당연하게 여기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죄를 뿌려놓고 간 결과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정신을 바짝 차려라, 생각을 신중히 해봐라, 미지근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 생각해보라, 사단이 너희를 유혹하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방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싸워서 이겨라, 공격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방언, 주문을 외워 마귀를 공격하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방어는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싸울 때 우리가 지켜야 하는 전선에서 여러 군인들이 방패를 하나로 해서 지켜내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사단과 마귀가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도록 대항하는 것입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믿음에서 옵니다. 사단을 대적하는 영적인 무기들이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인 말씀이 등장합니다. 믿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마귀들을 대항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전쟁터에서 우리의 전우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 너희들만 특별히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의 군사들은 같은 주적 마귀와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선택할 때 함께 선택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나운 대적 마귀와 싸우는데 경계하고 대항해야 하는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싸움을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우리의 대장은 모든 은혜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의의 하나님, 평안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무기를 하나님이 다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대장님은 마귀와 싸울 수 있는 무리를 다 가지고 계시니 걱정 말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 승리는 보장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의 진영으로 불러주셨고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승리를 이끌어가시는지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온전하게 하는 것은 어그러지고 잘못된 것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굳건하고 강하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연약한 면들, 무기들이 연약할 때 강하게 보충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도 강하게 훈련시켜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터를 굳건히 지켜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지켜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하고 위협적인 존재인 마귀가 있으나 우리는 정신차리고 깨어 대항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이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 우리에게는 보장된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정신 차려서 경계하여 믿음으로 대항해야 합니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드리겠습니다(조엘 비키).

① 말씀을 따라 살라

②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③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④ 사단의 유혹을 즉각적으로 피하라

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⑥ 겸손하라

⑦ 항상 정신 차리고 깨어있으라

⑧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라

⑨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하여 이기라

⑩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모든 힘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마귀를 이긴다는 것도 하나님의 권능에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넘어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당시는 로마 정부가 무궁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 제국을 통해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권능은 영원무궁하다는 것, 인간의 권세를 무너질 것이나 하나님의 권능은 무궁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편지의 전달자는 실루아노, 곧 실라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 적었고 이 편지를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실라가 믿을만한 자였기에 “신실한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이 편지의 목적은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고 그들이 이 은혜에 굳게 서는 것”이었습니다. 환란 중에 있으나 이 구원이 너희에게 참된 것이니 은혜 안에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보내는 사람에 대해 택하심을 받은 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오랜 세월 전에 없어진 나라입니다. 베드로가 있는 지명을 밝히기 어려웠을 수 있고, 일종의 암호명, 당시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듯이 로마가 교회를 핍박하는 역할을 하기에 바벨론이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대적이 있는 중심 수도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마가 요한(바나바의 조카, 바울의 동역자, 복음서 저자)도 로마에 베드로와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형제간의 친밀감과 사랑을 나타내는 문화적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평강이 있으리라고 축원합니다.

편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비장감이 느껴집니다. 마치 전쟁 중에 편지를 쓰는 것 같습니다. 전선에서 싸우는 부대원을 생각하면서 계속 싸워라, 잘 하고 있다, 이제 더 큰 공격이 올 것이다, 지금 믿고 있는 믿음 가운데 굳건히 싸우라는 권고 같았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경고하면서, 우리가 신뢰하고 따르는 대장 하나님은 더욱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의 마지막 시점에 요한 계시록을 보면, 요한은 예수님의 계시로 일곱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에게 동일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여러분은 이기고 있습니까, 지금 싸우고 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지근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습니까.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싸우라고 권하고 있고, 예수님은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주적이 있습니다. 그는 실존합니다. 그는 수많은 무리와 함께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식이 풍성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압니다. 게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힘을 잃어간다, 믿음을 잃어간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다보면 스스로 보험설계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점, 나에게 돌아오는 유익들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군사를 소집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목숨을 다하며 영적인 싸움을 싸울 군사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기고 계십니까. 싸우고 계십니까. 경계하고 계십니까. 마귀를 대항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귀를 대항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