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네 꿈은 예능인

본문 : 로마서 15장 1-6절

설교자 : 이병권

말씀의 제목을 더 길게 말하면 ‘내 꿈은 예능인, 기쁨을 주는 사람’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목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때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목표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주는 사람’이라는 목표를 마음에 새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직접적인 명령은 하나입니다. 2절에 나오는 “기쁘게 하되”인데, 기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저는 오늘 ‘기쁘게 하라’는 이 명령을 중심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쁨을 주는 대상, 방법, 이유를 차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누구에게 기쁨을 줘야하는지, 기쁨을 주는 대상입니다.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기쁘게 하라는 명령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을 주는 대상은 이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이웃은 누구일까요?

예를 들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을 때, 이웃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섬기는 대상으로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자라고 했을 때, 이웃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이웃은 1절을 통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명령을 자신을 포함하는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쁘게 해야 하는 대상은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문맥으로 생각하면, 2절의 이웃은 믿음이 약한 자이고 로마 교회의 지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이웃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쁨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 함께 주님을 섬기고 있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형제자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라는 했을 때 대조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타협하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죄를 용납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나의 기쁨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를 위해서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기쁨을 위해 자발적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우리의 기본 세팅이 그러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맞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명령하십니다. 나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라!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나의 기쁨이 아니라 이웃의 기쁨입니다. 내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TV에 나오는 예능인을 보면 때로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굴욕적인 모습이 되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그런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이 아니라, 단순히 웃음이 아니라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기쁨인데, 그 기쁨을 추구하는 우리는 얼마나 더 기쁨을 위해 수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예능인이 되어 이루려는 목표는 기쁨,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기쁨입니다. 기쁨 그 자체가 아니라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움으로 기뻐하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에게 영원에 이르는 참된 유익을 주기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다른 모든 것을 앞서게 되는 우선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자매의 기쁨을 위해 무엇이든 받아주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기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 형제자매를 기쁘게 하는 것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명령에 덧붙여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은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떻게 기쁨을 줘야하는지, 기쁨을 주는 방법입니다.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강한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쁨을 주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담당하고”라는 말은 짐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6:2)고 명령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와야 될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어리고 연약한 자라면 더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대상이 나와 가까운 사이라면, 나의 가족이라면 그 짐을 함께 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교회의 지체를, 형제자매를 바라봐야 합니다. 형제자매의 연약함은 내가 마땅히 담당해야하는 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짐을 기꺼이 들어주는 것이 나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들의 어떤 모습이 부모에게 기쁨이 될까요? 서로 우애 있는 모습으로 기대하는 것, 형이나 언니가 동생의 약점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모습이 아닐까요?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꺼이 그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함께하는 모습을 기대하게 됩니다. 자녀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실 때 그렇지 않을까요?

누군가의 부족함으로 인해 나의 수고가 필요하게 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경험하게 될 때 화가 날수도 있습니다. 그런 피해 아닌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한숨이 나올 수 있고 불편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짐을 지기 위해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도울 수 있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질 수 있도록 부르셨고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하라고 서로의 짐을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지고 서로의 약점을 담당할 때 서로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누구에게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하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부족한 점이 내가 담당해야하는 짐이 되지만, 바꾸어 말하면 나의 부족한 점이 누군가의 짐이 되기도 합니다.

나만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함께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함께 하면 쉽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주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하면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의 짐을 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쁨을 주는 방법은 받아주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서로를 받아주고 섬길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의 방향이 그러합니다. 섬김으로 선을 이루고 섬김으로 덕을 세우며 서로의 약점을 받아줌으로써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셋째,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쁨을 주는 이유
15: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3절은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이 자기의 기쁨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자로 사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언급하면서 시편69편을 인용하는데, 신약의 여러 곳에서 인용된 시편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거절하셨고 비방자들의 비방, 그 모든 부당한 모욕을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비방, 그 모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욕을 얻어먹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험한 말을 듣는 것, 안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당하신 비방, 그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일까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주님이 받으신 비방의 크기와 그 무게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내가 잘못을 해서 욕을 먹는 것과 잘못 없이 욕을 먹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왕이 백성을 욕하는 일과 백성이 왕을 욕하는 일은 다릅니다. 주님이 당하신 일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거룩하신 분, 창조주 하나님이 그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비방을 받으며 부당한 일을 당하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자기를 기쁘게 하셨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입니다. 주님은 충분히 모욕을 피할 수 있었고 비방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비방을 피하기보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그 모든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감당하신 고난의 크기와 무게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본을 통해 우리가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과 형제자매를 기쁘게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빌2:6-8) 우리가 따라야 할 본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고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기에 우리도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시편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을 통해 성경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 추가적인 언급을 합니다.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은 일차적으로 당시의 청중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지금 우리에게도 교훈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인내할 수 있고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고난 중에도 영원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오늘 분문의 명령을 따를 때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우리 교회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서 기쁨을 주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능인이 되어서 이웃에게 참된 기쁨을 줍니다. 형제자매를 서로 받아주고 서로가 서로를 섬김으로 기쁨이 됩니다. 우리 주님의 겸손을 본받은 모습으로, 우리 주님의 섬김을 본받은 모습으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교회가 될 때 그 모습이 어떠할지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 모습을 바울의 기도에서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15: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바울의 소원이 담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기도는 로마 교회가 이루어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간접적인 권면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이 소원하는 교회의 모습, 그 기도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꿈이며 우리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를 본받아서 뜻을 같이 하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서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이 모습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저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 모두가 예능인이 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이 먼저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기 기쁨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사람으로 사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같은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 단순히 웃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주는 사람, 형제자매를 받아주고 섬김으로 기쁨을 주는 사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그것이 삶의 최우선순위에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나의 기쁨을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주님의 기쁨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우리가 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더 기쁠 수 있는 방법은 나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참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힘들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불평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생각처럼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원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원치 않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부족함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아시고 은혜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우리의 꿈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기에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기쁨을 버리시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셨던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더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주님께 더 동의하면 할수록, 우리가 주님으로 더 채우면 채울수록, 우리가 주님을 더 닮은 모습으로 주님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