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그네로 사는 법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1-17절

설교자: 조정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그네로 사는 인생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이 땅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거류민과 나그네. 땅에 어떤 권세가 세워지는지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권세가 세워지든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일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동시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This is my Father’s world)을 부른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본향에 도달하기 전까지 이 땅에 나그네로 살 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 살펴보기 원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선진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그들과 같은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는 삶,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삶이 그에 합당한 삶인가? 말씀을 통해 알아보자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먼저,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부른다. 거류민은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 사는 사람’(외국인, 체류자),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그네는 ‘떠돌아다니는 사람’, ‘행인’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죄 많은 이 세상에 체류하고 있다. 분명히 이 땅에 거주하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심판과 멸망으로 불태우기 전까지 보호하고 계신 일시적인 장소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라고 말했다(벧후 3:7). 그리스도인은 잠시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속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다.

당신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는가? 거류민과 나그네로 이 땅을 살고 있다고 바르게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이것이 첫 시작이다. 바른 정체성은 바른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은 마땅히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 강력하게 촉구하신 권면에 귀를 기울인다: 1. 사랑하는 자들아…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후 5:20).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12)

인생이 고달픈 건 궁극적으로 죄 때문이다. 죄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도록 노동의 고통을 배가했고, 남편과 아내 및 모든 인간관계 속에 갈등과 전쟁을 일으켰다. 질병과 죽음을 가져온 것도 죄다. 죄가 가져온 최악의 결과는 하나님과 영원한 분리, 영적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의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롬 8:1,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지만 그 말은 곧 죄에게 전쟁 포고를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주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인생을 산다.

우리는 여러 대적과 싸우고 있다. 1)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우고(엡 6:12), 2) 타락한 이 세대와 싸우며(롬 12:2), 3) 우리 육체의 정욕과도 싸운다(롬 7:21-24). 특별히 육체의 정욕은 우리 안에서 쉼 없이 우리 영혼을 거슬러 싸운다. 육체의 정욕과 성령의 소욕이 날마다 싸운다(갈 5:17). “내 안에 전쟁 되풀이되는 고통”(전쟁).

하나님을 위해 선을 열심히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가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이 육체를 벗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죄를 피하고 멀리하고 억제해야 한다.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강력한 권면을 했다(골 3:5). 절대 방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히 12:4).

정욕을 제어하고 죄를 멀리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도박 중독자가 도박을 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실히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죄와의 싸움은 의로운 행실을 맺는 것까지 나아가야 온전한 승리(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12절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권면한 것이다.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은 선을 열심히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딛 2:14).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엡 2:10). 하나님 나라 백성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왕의 명령에 순종한다(벧전 1:16). 선한 행실은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말씀하신 온전하고 기뻐하시는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말하고 있다(딤후 3:16-7).

거짓말을 멈추는 것에서 오직 참된 것을 말하기까지, 음란한 생각과 행위를 멀리하는 것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부부생활을 하는 것까지,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사는 것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남을 돕는 삶을 사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4).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는(성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전도의 방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거주하는 이 땅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12절에서 이방인이라고 말한 대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며, 종종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악행한다고 함부로 비방한다. 

비방은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인이 죄가 있어 비방을 당할 때도 물론 있지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이 세대로부터 충분히 비방을 받을 수 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도 그리스도인은 남녀가 비밀 모임을 갖고 혼잡한 성관계를 갖거나 사람의 피를 마시고 권세를 거역한다는 등 여러 가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악행한다는 비방을 받았다. 초대 교회가 그런 억울한 비방을 받았을 때 그것을 잠재우는 데 가장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은 바로 세상 사람과 차원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이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하지만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영접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이 세상 사람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삶인가? 당신의 삶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잘못된 비방을 잠재우기에 충분히 선하고 아름다운가? 당신이 씨름하고 제어할 죄를 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치열하게 싸우라. 그 죄 대신 옷 입을 새 사람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으로부터 삶의 온전한 변화를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그리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

2. 인간의 제도를 순종하라(13-15)

13절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거하는 백성으로서 세워진 모든 제도를 순종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순종하라”가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선량하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 안에 “위에 있는 왕”(현직 권세자)과 그가 보낸 총독을 예로 제시했다. 로마서 13장 3-4절에 나온 것처럼, 권세는 기본적으로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존재하며 그렇게함으로써 사회를 존속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순기능을 갖는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일반적으로 그 목적을 위해 세워진다.

이 땅에 거하는 거류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인간이 세운 제도를 무시하거나 권세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백성에게 당신을 위하여 이 땅에서 선량하고 순응하는 백성이 되기를 기뻐하신다.

15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우리말성경선을 행해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세워진 제도와 권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이 뜻에 따라 살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신다.

갈수록 교회가 세상의 비방을 많이 받고 있다. 때론 세상의 공의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잣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보기 때문에 억울하게 당하는 무식한 말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교회가 세상의 제도와 권세를 부정하고 반대하며 법을 어기고 상식을 벗어나 합당한 비판을 당할 때도 많다.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다니엘을 시기했던 어리석은 고관들이 무식하게 다니엘을 비방하며 고발하려고 근거를 찾으려 했지만 성경은 이렇게 다니엘을 변호한다.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

이 땅에 거주하면서 제도와 권세를 반대하고 법과 질서를 어기면서 욕을 먹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하여 어리석고 무식한 비방을 막으실 만큼 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주를 위하여 법을 지키고 권세에 순종하는 선량한 준법 시민이 되기 위해 지금 내가 변해야 하는 삶의 영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다니엘처럼 오직 신앙 외에는 고발할 근거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3. 하나님 종처럼 행동하라(16-17)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삶을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거주하는 거류민으로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땅에 세워진 인간의 제도와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통하여 악한 자들의 비방을 막으신다. 그들의 영혼을 만나주신다. 거듭나게 하신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이 땅의 나그네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잘못된 비방을 비롯한 세상의 죄를 꾸짖는 하나님의 정죄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당신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당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마지막 세 번째로 베드로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삶을 요약하고 적용을 제시한다. 11-15절까지 베드로가 제시한 삶의 모습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종처럼 행하는 삶이다.

16절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이 땅에 있을 때 그리고 이 땅을 떠날 때 달라지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구원받은 순간부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주인의 달란트를 관리한 하나님의 청지기들은 주인이 돌아와서도 그 행한 일의 결과에 따라 상을 받고 계속해서 그 주인을 섬기는 일을 한다(마 25).

그러므로 나그네로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의 종처럼 살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매여있지 않다. 자유가 있다. 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없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 특히 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이 땅에서 자유인처럼 행하라.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악을 가리는데 그 자유를 쓸 수는 없다. 하나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선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악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철저히 하나님께 종속되어야 한다. 복종해야 한다.

악한 세상에서 자유롭고 하나님께 종속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에서 모두 나타난다.

 17절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총 네 가지 대상이 언급되는데, 먼저, 세 번째로 언급된 하나님을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경외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 사랑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원한다. 경외한다. 두려워한다. 그분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대로 살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수평적 관계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먼저 그들은 뭇 사람(모든 사람)을 공경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왕을 존대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형제자매를 사랑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고(요일 4:20),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형제자매를 “마음으로 뜨겁게…사랑하라”고 명령했다(벧전 1:22).

잠시 이 땅의 나그네로서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누구도 무시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들을 존중하라. 세워진 권세를 욕하고 비방하지 말라. 하나님이 세우신 그들을 복종하고 존중하라.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판단하지 말라. 뜨겁게 끝까지 사랑하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간과하고 자유롭게 악을 행하며 살지 말라.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코람데오)을 살라.

며칠 전 공기가 맑은 날, 진위천 물가 산책길을 걸으며 멋진 구름과 파란 하늘이 펼쳐진 위를 바라본 적이 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 저를 지금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라는 고백이 나왔다. 특별히 괴로운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땅의 나그네로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악한 세상에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육체의 정욕과 날마다 씨름하는 삶은 너무 수고스럽다. 탄식이 흘러나올 정도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세상의 비방은 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참된 것을 말하여 사랑으로 그들의 비방에 대답하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은 참으로 고되다. 권세는 우리를 늘 실망시킨다. 평안하고 고요한 삶을 살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을 직간접적으로 핍박하는 정책이 어떤 권세가 세워지든 세월이 갈수록 늘어간다.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힘과 위로를 얻고 기쁨을 누리지만 때로는 육체의 정욕과 여전히 싸우는 형제자매로 인해 힘을 잃고 낙심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병들고 먼저 우리를 떠나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그네의 삶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본향을 간절히 찾는 삶을 산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산다(골 3:1-2).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참된 기쁨과 영광과 소망이 모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의 삶이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결코 감당하지 못할 삶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인이 나그네의 삶을 마무리하는 그날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약속하셨다(계 22:20). 날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살자(계 22:20).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자(벧후 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