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흔들리지 않는 이유
본문 : 시편 62편
설교자 : 최종혁
새해가 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 중 하나가 소망, 희망, 바람, 기대와 같은 단어들이다. 사실 12월 31일 11시 59분 59초에서 1월 1일 0시 0분 0초가 되는 것은 1초가 지난 것 뿐이고 그 1초는 계속해서 지나가는 1초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1초에 사람들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설레어 한다. 사실 꼭 새해가 될 때뿐 아니라 이렇게 시간의 경계를 지날 때마다 뭔가 변화가 있기를 바라고 그 변화가 좋은 것이기를 사람들은 소망한다. 특히 2020년은 전세계 사람들 모두에게 특별한 한 해였고, 좋은 쪽으로 가 아니라 좋지 않은 쪽으로 그랬기 때문에, 정말 모든 사람이 2021년을 맞이하면서 한마음으로 좋은 변화가 찾아오기를 기대했고 또 여전히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 근거 없는 소망은 현실을 마주했을 때, 오히려 더 큰 절망과 좌절을 가져다줄 뿐이다. 2021년이 되었으니 이제 코로나19도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희망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당장에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한다면 현실의 절망만 더 커질 것이다. 어차피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의 기대는 정말로 기댈 만한 곳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야 지금을 참된 소망과 행복, 평안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편 62편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다윗의 시편을 보았다. 그 시편들의 다수가 다윗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기록한 시로서, 그런 고난 속에서 그가 경험한 고통, 감정들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끝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확신 가운데 예배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시편 62편에서도 다윗은 고난 가운데 있음이 분명하다. 상황에 대한 묘사가 3-4절에만 길지 않게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의 대적들이 합력하여 공격하고 있고 다윗은 언제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상황이다. 사울을 피해 도망했을 때나 압살롬의 반역 때 피난했던 상황이 연상되는 그런 상황이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압살롬의 반역 때가 더 적합할 것이다.
고난 중에 기록한 시편이라는 유사성이 있지만, 시편 62편의 가장 큰 특징, 그래서 가장 주목할 점은 다윗의 확신이다. 다윗은 염려하거나 원망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확신한다. 1-2절과 5-6절은 거의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데, 시작에서는 ‘잠잠함’을 언급하고 마지막에는 ‘흔들리지 않음’을 언급한다. 지금 이 폭풍 같은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잠잠할 수 있었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잔잔한 호수에 떠있는 배처럼 고요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바울처럼 주어진 것에 자족하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주 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세상에 나타냄으로 주님을 전하고 싶을 것이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을까?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좀 불편한 정도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위협하고 더 나아가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이 교회를 보는 눈이 곱지 않은 이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한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일, 자녀들, 심지어 가장 가까이 있어 항상 나의 편이 되어 주어야할 것 같은 소중한 사람들도 때로는 원수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급류를 떠내려가는 뗏목에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우리를 흔들 때, 우리는 흔들린다.
그래서 시편 62편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말한다. 본문을 보면 “셀라”를 기준으로 해서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고백, 흔들리지 않는다(1-4절)
- 다짐, 흔들리지 말자(5-8절)
III. 이유, 흔들릴 수 없다(9-12절)
I. 고백, 흔들리지 않는다(1-4절)
먼저 다윗은 놀라운 고백으로 이 시편을 시작한다.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이 고백에서 다윗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한다. 하나는 그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고난 중에 기록한 다윗의 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62편 앞뒤로 있는 시편들만 봐도 “하나님이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탄식하기도 하고 도우심을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62편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12절에 가서야 나온다. 그것도 무엇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부른 것뿐이다. 이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확신이 기초에 깔려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크게 부르면서 지금 당장 뭔가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잠잠하다. 5절에서도 다윗은 “나의 영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사실 “나” 와 같은 의미다. 여기서 “영혼” 은 한 사람에게서 육체와는 구별되는 영적인 부분 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 사람 자체 혹은 그 사람의 본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우리도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한다. 누가 성의없이 동의하거나 웃거나 하면 ‘영혼이 없다’ 는 말을 한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 다윗도 그런 의미에서 “나” 라는 일반적인 표현보다는 “나의 영혼” 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잠잠히,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있다. “바람이여”는 본래는 없는 동사가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된 것이다. 다윗은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있다. 그 이유는 두번째 사실에 기인한다. 그의 구원에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지금 다윗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고, 그 상황에서의 구원은 하나님께로서 오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2절은 1절의 말씀을 좀 더 확장하고 풀어 쓴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의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의 반석이시고 구원이시고 요새이시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살펴봤던 표현들이다. 다윗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 즉 보호자가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구원도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그 하나님이 계시는 한, 다윗은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서 다윗은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고 있다.
이런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윗이 구원이 필요한 상황, 보호가 필요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3절에서 그는 자신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 이라고 표현한다. 다 쓰러져간다는 말이다. 저항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는 상태다. 그러면서 그의 대적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고 묻는다. 궁금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놀라움의 표현이다.
4절에서는 대적들이 공격하는 의도와 방법에 대해서 말한다.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다윗의 대적들은 분명한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다윗을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거짓이었다. 속으로는 저주 하면서 겉으로는 축복의 말을 쏟아냈다. 겉으로는 친구인 듯, 그의 편인 듯, 좋은 말들을 하며 악한 의도를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공세를 막아낼 힘이 다윗에게는 없었다. 그는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았다. 그냥 두면 무너질 것이었다. 그의 대적들이 원하는 대로 다윗은 높은 자리에서 떨어질 것이었다. 그 때 다윗 영혼은 그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했다. 다윗 자신은 넘어지는 담과 같고 흔들리는 울타리 같지만, 반석이시고 요새이시고 구원이신 하나님을 흔들리지 않고 잠잠히 기다렸다.
기다림이 쉽지는 않지만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잠잠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채지 않는 것이다.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안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믿지 못해서, 확신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말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부모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해주려고 했던 것도 해주기 싫어지기도 한다. 하나님이 그러시지는 않으시지만, 때로 우리는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서 의심을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다윗은 침착하게 조용히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를 기다린다.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말 죽은 듯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시편 62편으로 하나님께 말했다. 8절에서 백성들에게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고 권하는 것으로 보아 그 자신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그의 마음은 고요했고 확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신 가운데 고백한다.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지만 다윗은 지금의 고백과 확신에 만족하지 않는다. ‘와, 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니, 이제 나도 웬만큼 성장한 것 같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고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코로나를 비롯한 다양한 고난을 잘 이겨내고 계신 성도들도 그래야 한다. 이 정도로 난 끄떡없어 라고 교만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 서있는 사람은 언제든 넘어질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다짐했다. 흔들리지 말자.
II. 다짐, 흔들리지 말자(5-8절)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2절의 말씀과 거의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6절의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는 2절과 동일하지만 “크게”가 빠져있다. 의미상 큰 차이를 만드는 변화는 아니다.
두번째로 1절의 “나의 구원”이 5절에서는 “나의 소망”으로 바뀌었다. 구원과 소망이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이 경우에서는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다윗이 현재 소망하는 것이 바로 이 상황에서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1절의 ‘바란다’는 평서문이 5절에서는 ‘바라라’는 명령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잠잠히’가 ‘잠잠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위해 ‘바라라’가 번역에는 추가되었다.
이미 잠잠하고 있는데 잠잠하라라고 명령하는 것이 이상하거나 모순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지만 언제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난은 괜찮지만 고난의 강도가 더 강해지면 더 이상 참지 못할 수도 있다. 고난의 강도가 강해지지 않더라도 고난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려놓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게 거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람들조차도 시험에 넘어졌는데, 지금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겠는가? 믿고 구원 받은 자들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은 남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만 강할 수 있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좀 괜찮아 보인다고 안주하면 넘어지는 것은 정말 시간문제다.
다윗은 자신을 잘 알았고 그래서 이렇게 다짐하는 것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면서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바라본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 대적들은 다윗의 영광을 빼앗기 위해 그를 공격하고 있지만(4절) 사실 그 영광은 궁극적으로 다윗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다윗의 강한 반석도 피난처도 모두 하나님 그분이시다. 하나님께 피한 다윗에게 있어 이 싸움은 다윗과 그의 대적들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적들의 싸움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를 백성들에게도 이렇게 권고한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다윗이 피한 하나님은 다윗의 피난처만 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의 피난처가 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시로 즉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 앞에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 피할 곳이 필요하다면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피하면 된다. 의지할 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 의지하면 된다. 지금 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소망을 품는다면 하나님께 그 소망을 두면 된다. 우리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다윗처럼 이렇게 다짐하라.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자. 내 영혼아, 흔들리지 말자.
이걸 주문처럼 외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9-12절에서 다윗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어떤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III. 이유, 흔들릴 수 없다(9-12절)
여기까지 말씀에서 가장 강조되고 이목을 끄는 표현은 사실 ‘만’이라는 표현이다. 히브리어로는 ‘아크’라고 하는 단어인데 1, 2, 4, 5, 6, 그리고 9절의 가장 앞에 사용되었다. 특별한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4번, 앞서 말한 다윗의 대적들의 의도에 대해서 1번, 그리고 9절에서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1번 사용되었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실 중의적이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라는 의미도 되고 그 이유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즉,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유일하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그가 흔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9-10절에서 다윗은 당시 사람들이 주로 의지할만한 두 가지를 예로 말한다.
먼저는 사람이다. 사람은 의지할만할까?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바른 성경, “참으로 천한 자도 헛되며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올려놓으면 입김보다 가볍다.”
이 외에 쉬운 성경, 현대인의 성경, 우리말 성경, 킹 제임스 성경 들을 봐도 공통적으로 “사람”과 “인생”을 ‘낮은 자’와 ‘높은 자’로 번역을 했다. 사람과 인생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이렇게 의미 상의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여기서는 그런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입김 같다. 그 자체로 대단하지 않다는 말이다. 인생, 즉 높은 자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단지 대단한 척하는 ‘속이는 자’들일 뿐, 입김 같은 것은 매한가지다. 저울에 달면 이 사람이나 그 사람이나 다 입김보다 가벼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소망을 둔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재물이다. 사람이 그렇다면 재물은 의지할만할까?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여기 포악이나 탈취한 것이라는 표현은 어떤 수단으로든 재물을 늘리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재물을 늘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의지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빼앗은 재물은 그렇게 빼앗기기 쉽다. 돈든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손 안에 있는 재물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땅의 재물은 영혼의 문제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러니 재물을 의지한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다르다. 11-12절에서 다윗은 아주 중요한, 어쩌면 이 땅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권능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함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편에서 몇 차례 만났던 개념이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특별하다. 하나님이 강하시고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이 사실이 우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그리고 유일한 기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강하시다. 그래서 그 무엇도 하나님을 흔들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사랑이시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할 때는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지 못하실 때는 없다. 그 능력과 사랑이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변할 수 없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흔들릴 수 없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 주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것이 다윗이 고난 중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우리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고 소망해야 한다.
사실 당연한 말이다. 아마 이 말을 부인할 성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말과는 달리 우리가 하나님만을 우리의 구원과 소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지식이 많아지고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오늘날 우리는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려 할 때가 많다. 하나님만을 바란다고 말은 하지만 거기에 추가된 것들이 있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것에 흔들리는 것이 추가되면 결국은 흔들리는 것만 남는다. 흔들리지 않으시는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주목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도전
평안 형제 노래 중에 ‘흔들 흔들’이라는 제목의 트로트가 아닌 노래가 있다. 흔들리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더 나은 내일을 소망한다는 내용의 노래다. 사실 그렇다. 거룩한 삶을 원하지만 전혀 죄가 없는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흔들리지 않는 삶을 원하지만 정말로 전혀 흔들리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흔들리는 삶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붙들고 살아갈 수는 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붙들고 있는 그 이유가 절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유일한 이유는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로 말씀을 마무리하기 원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 그 안에서 소망을 찾고 이렇게 기록했다.
애 3:20-26, 개정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언제든,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되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