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화를 듣고 돌이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 누가복음 11장 44~54절
설교자 : 이병권
지난 주일에 우리는 “진정한 바리새인 되기”라는 제목으로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은 계속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화를 선포하십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화를 선포하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바리새인에게 화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율법교사에게 화를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지난주와 어울리게 “진정한 율법교사 되기”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 말씀이 지난 주 말씀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화”에 대한 말씀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돌이키는 우리에게는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책망하신 대상은 달라졌지만 그 내용은 비슷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는 같은 그룹으로 묶을 수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바리새인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율법교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교사도 바리새인처럼 전통으로 성경을 대신했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은 그들의 외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겉만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거룩한 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율법교사라고 하면 유대교의 학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문적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교사들이 했던 중요한 일이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 성경을 보존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서 성경을 베껴 적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서기관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서기관”이 더 일반적인 표현이고, “율법교사”는 누가복음에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 외에는 마태복음에서 한 번만 나옵니다. 그래서 “율법교사”라는 말은 누가의 특징적인 표현이고 복음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은 서기관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오늘 본문 53절에도 보면 율법교사가 아니라 서기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은 바리새인의 집입니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에게 식사 초대를 받으셔서 방문하셨는데, 그 집에 율법교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불만을 드러냅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절)
율법교사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이 못마땅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실천하는 자로서 유대인들을 이끌었다면, 율법교사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자로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며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선생이라 할 수 있는 율법교사를 책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을 가르친 우리까지도 모욕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율법교사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모욕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잘못된 비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율법교사의 잘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세 번에 걸쳐서 화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앞서서 바리새인에게 세 번의 화를 선포하셨는데, 이번에는 율법교사에게 세 번의 화를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쌍을 이루어서 구조적으로 평행을 만드는 것이 누가의 특징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과 비교하면 이 특징은 더 분명해집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15,23,25,27,29)라고 하시며 일곱 번의 화를 연달아 선언하십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구분해서 세 번의 화를 선언합니다.
그러면 누가가 왜 이렇게 쌍으로 기록했을까요? 그가 쌍으로 기록해서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구조가 쌍으로 되어 있으니 기억하기에 더 좋은 면이 있을 것이고, 서로 비교와 대조가 되니까 메시지를 더 부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흥미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이 말은 슬픔과 깊은 탄식에서 나오는 경고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경고하신 것은 그들의 죄를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세 번에 걸쳐서 선언하신 화를 차례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반응을 주목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화”는 loader 짐을 싣는 율법교사를 향해 선포됩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는 율법교사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여기서 ‘지우다’는 단어는 배나 짐승에게 짐을 싣는 것을 뜻하는데, 비유적으로 사람에게 힘들고 과중한 일을 맡기는 것을 말해줍니다. 율법교사는 사람들이 지기 힘든 무거운 짐들을 계속해서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율법 외에 613개의 규범을 추가로 만들었고, 그 규범에 대해서 지켜야 할 세부적인 사항들을 만들었습니다. 율법은 율법교사들의 해석을 거치면서 지기 어려운 짐으로 전락했습니다. 지기 어려운 짐이라는 말은 율법교사가 의도적으로 율법을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율법해석은 과장되거나 왜곡되었고, 율법이 주어진 본래의 의도와 의미에서 멀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삶을 지배하는 수많은 규율에 짓눌려 있었고 율법교사는 사람들을 실패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이 짐을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였고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3-4)
만약 우리 교회에서 율법교사가 했던 것처럼 하면 어떨까요? 예배에 참석하려면 613개로 구성된 목록을 체크해서 한 주 동안 그 목록에 적혀있는 것을 모두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라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예배드릴 수 없는 자로 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눈치를 보며 안 지켜도 지킨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규정을 지킨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며 지키지 못한 사람을 판단할 수 있고, 지키지 못한 사람은 죄책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신앙이 정말 삶을 짓누르는 짐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에 대한 규정을 만듭니다. 찬양을 부를 때 입은 적어도 3센티 이상으로 벌려야 하며, 음량은 70데시벨 이상 되어야 하며, 찬양의 가사에는 적어도 세 번 이상 하나님이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니까, 이렇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에 매여서 집착하면 이런 규정들이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정작 중요한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고, 위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규칙이 아니라 규칙을 통해서 달성하려는 본질입니다. 그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우리가 마음껏 누리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러한 짐이 되지 않도록 살피고 점검하고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화”는 builder 건축하는 율법교사를 향해 선포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47-48)
여기에 나오는 ‘만든다’라는 말은 건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율법교사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비석을 세우고 꾸미는 일을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을 했을까요?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정치적 행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현충원을 방문해서 참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박해를 받고 순교한 선지자들을 존중하며 그 선지자들의 뜻을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무덤 만드는 일을 했던 것은 백성들에게 자신을 선전하기 위한 위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무덤만을 만들었을 뿐, 선지자들이 전했던 메시지는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보내신 모든 선지자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을 향한 배척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그들은 선지자가 아니라 선지자를 죽인 자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닙니다. 이미 말씀되었던 것이고, 선지자들도 알고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는 항상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미워하여 핍박하고 죽입니다.
그에 대한 결과는 그들이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피의 대가입니다. 아벨의 피는 구약성경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이고, 사가랴의 피는 구약성경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창세기가 시작이고 말라기가 마지막이지만, 유대인의 성경은 창세기가 시작이고 역대하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마지막에 나오는 순교자가 사가랴이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순교자를 대표해서 아벨에서 사가랴까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순교자의 모든 피에 대한 무게를 그 세대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거절했기에 다시는 메시아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AD70년에 예루살렘은 처참하게 멸망당했고,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율법교사가 무슨 일을 한 겁니까? 그들은 겉으로 선지자를 위한 무덤을 건축했지만, 더 중요한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를 무시했기에, 그런 위선적인 태도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진실로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화”가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를 선언하시며 경고하실 때 화가 정말 화가 되게 하려면, 하던 대로 계속하면 됩니다. 잘못을 지적받을 때 무시하면 됩니다. 죄에 대해 책망을 받았을 때 분노하면 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집중하면 됩니다. 혹시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미워하고 대적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화가 정말 화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율법교사처럼 무덤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은 선지자의 무덤이 아니라, 자신의 무덤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 “화”는 gatekeeper 문을 지키는 율법교사를 향해 선포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52) 예수님은 열쇠를 가지고 문을 지키고 있는 율법교사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교사가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문을 닫고서 안 열어줍니다. 자기가 안 들어가는 것은 둘째 치고 들어가려는 사람까지도 막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얼른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이 잠겨 있어 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열쇠를 가진 사람이 문을 열기는커녕 문을 막고 있다면 어떨까요? 자기가 고생하는 거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까지 고생시키는 건 뭡니까? 문은 열어주고 혼자 밖에 있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추위에 떨며 고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잠깐 동안 시간을 지체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집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영원이 걸려있는 문제라면 어떻겠습니까? 천국 문을 막고 서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막고 있는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 책임이 얼마나 중한 것이며, 얼마나 큰 악을 행하는 것일까요?
율법교사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습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는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누구보다 자주 읽으며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약속의 성취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메시아를 알아보았어야 했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이기적인 기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천국 문을 잠근 뒤 열쇠를 숨기고 그들이 들어가게 해주리라고 믿는 모든 사람과 함께 밖에 서 있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율법교사와 같은 문지기를 보면 어떻겠습니까? 주인이 자신의 집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문지기가 문 앞을 막고서 손님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속 터지는 일이 아닙니까? 율법교사는 자신이 열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이 주인에게 임무를 받은 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백성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믿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가는 멸망의 길로 백성들을 인도했던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화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백성들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예수님의 “화”에 대한 선언이 끝나고, 이제 그들의 반응이 기록됩니다.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53-54)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율법교사의 모습은 hunter 사냥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을 책잡기 위해서 노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책잡는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사냥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노리고 있다’는 말은 함정을 준비해 숨어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서 매복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그들이 얼마나 격한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후, 그 책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박해했던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적받았을 때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괴로워하며 돌이키는 반응이 있지만, 반면에 자신의 죄를 부인하며 죄를 지적한 사람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까지 살펴본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에 이어서 율법교사에게도 화를 선언하십니다. 첫 번째 “화”는 loader, 짐을 싣는 자인 그들은 성경보다 전통을 앞세우며 여러 가지 율법에 대한 세부규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버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두 번째 “화”는 builder, 건축자인 그들은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며 기념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를 거절하며 대적하는 위선적인 일을 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들은 마땅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화”는 gatekeeper, 문지기인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들이기보다, 문을 닫아버림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hunter, 사냥꾼인 그들은 예수님의 화를 듣고서 돌이키기 보다는 대적합니다. 마치 사냥꾼처럼 예수님을 잡으려고 틈을 노립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향해 “화”를 선언하신 것이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심한 일일까요? 그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해도 되는 걸까요? 자비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왜 이렇게 엄하게 대하실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을 자처하지만,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위험한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말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했으며, 정말 더 중요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규율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지배했고, 사람들 위에 군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적인 위치와 사회적 평판과 관계없이 그들의 죄악을 아주 심각하게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태에 대해서 진실을 말씀해주셨고, 또한 그들에게 돌이킬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화를 듣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버렸습니다.
예수님께 화 있을진저라는 책망을 직접 들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때로 내가 바리새인이 되고, 내가 율법교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화를 선언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돌이킨다면 우리는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항상 여러분의 마음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겉모양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충고나 책망의 말을 잘 받아들이는가? 나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하거나 화를 내진 않는가? 나는 내가 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교만한 생각에 빠지진 않는가? 나는 겉치레를 중요시 하느라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히 하지 않는가?
우리는 때때로 내 안에 살고 있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보면서 탄식하고 무너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나는 교만하고 악하지만, 나는 자주 넘어지고 연약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고, 나는 가식적이며,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나와 함께 하시며 부족함을 채우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올 한해에도 그러한 복을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