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형들을 시험하는 요셉
본문: 창세기 44장
설교자: 이병권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오늘 본문에서 진짜 시험을 시작합니다. 형들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정말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형들은 베냐민을 두고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동생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동생을 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잔인한 것 같지만 한 편으로 요셉은 이런 계산된 시험을 통해 형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 시험이 형들에게는 자신의 지난날의 죄를 회개했는지 증명하며, 과거를 지우고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떨쳐버리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범한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모습을 똑바로 보는 것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주님 안에서의 자유와 참 평안을 얻으려면, 나의 모습을 똑바로 보고 죄를 인정하며 그것으로부터 철저히 돌이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지금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자신에게 붙어있는 동생을 팔아버린 무자비한 형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습니다. 그럼 형들은 그러한 꼬리표를 뗄 수 있을까요? 요셉이 내는 이 시험문제에 대해서 형들은 어떤 답을 선택하는지, 어떻게 이 시험을 헤쳐 나가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1-3)
요셉은 베냐민을 데리고 온 형들을 풍성하게 대접하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경계심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애굽에서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가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제대로 일격을 날리려고 합니다. 준비하고 있다가 맞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맞으면 그 충격은 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형들을 정말 제대로 시험하기 위해 베냐민을 시기할 만한 일을 겪게 한 후에 베냐민이 사고를 친 것처럼 일을 꾸몄습니다. 이를 위해 요셉은 청지기에게 아무도 몰래 베냐민의 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어두고, 그들이 떠난 후에 뒤좇아 가서 잡아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그가 해야 하는 말도 친히 알려줍니다. 청지기는 강력한 말로 요셉의 형들을 고발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4)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5) 그들은 애굽에서 큰 호의를 받았지만, 이제 그 호의를 악으로 갚았다는 억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렸는데, 시므온도 풀려났고 베냐민도 함께 돌아가고 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청지기의 고발에 대해서 형들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7-9)
형들이 자신의 결백을 밝히면서 말하는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7절에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여기서 ‘결단코 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기에 절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8절을 풀이하면 ‘우리는 전에 자루에 있었던 돈도 다시 당신에게 가져왔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자라면, 이전에 자루에 있던 돈도 가져오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악을 행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9절에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죽음의 벌을 각오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에이, 은잔 하나를 두고 목숨까지 걸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아닙니다.’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잔을 훔쳤다고 해서 사형으로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이런 일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이런 호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잔을 훔쳤다면, 그는 분명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청지기가 나이 많은 자부터 차례대로 자루를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베냐민의 자루를 열기 전까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거봐, 이게 무슨 시간 낭비인가? 우리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형제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했는데, 마지막 베냐민의 자루에서 잔이 발견됩니다. 이 일은 형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서 발견되었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베냐민은 현행범으로 잡혀갑니다. 이 순간, 형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베냐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들까요?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지금 상황에 대해서 베냐민에게 책임을 돌리며 원망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자기가 벌인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충분히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야곱에게 있는 그대로를 다 이야기하고, 이 일은 베냐민이 남의 물건을 훔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자신들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이 집을 떠나기 전에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베냐민에 대해서 ‘잃으면 잃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각오했으니, 슬픔은 크겠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형들이 여전히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베냐민을 질투하고 있다면, 자기들끼리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 온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베냐민은커녕 자신들도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옛날처럼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요셉에게 했던 것처럼 베냐민을 애굽에 남겨두고 떠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형들은 달라졌습니다. 동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생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만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큰 슬픔으로 옷을 찢고 성으로 돌아와서 다시 요셉 앞에 엎드립니다. 형들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동생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형제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내가 받을 수 있는 부모의 사랑을 빼앗아가는 존재로 생각하면, 형제는 적이 될 수밖에 없고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건건 따지고 잘잘못을 가리고 실수나 죄를 지적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족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반응하지만, 순간순간 우리는 가족을 가족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가족,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적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다투고 싸우고 경쟁하는 상대가 아닙니다. 서로가 주님의 사랑을 더 받으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각자에게 아낌없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누구는 더 받고, 누구는 덜 받고, 비교할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고, 가족으로서 서로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베냐민을 위해 형들이 요셉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형들 가운데 유다가 말합니다.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유다가 형제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16)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이것은 분명 뭔가 오해가 있는 일이라며, 그럴 리가 없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무죄를 주장하지도 않고, 무죄임을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죄를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 상황을 자신들이 행한 악,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입니다. 마치 범죄자가 도망 다니다가 잡힌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형들은 또 다시 요셉에게 행한 죄를 요셉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눈앞에 있는 애굽의 총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애굽의 총리가 지금 그들의 죄를 묻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유다는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을 각오합니다. 자신과 형제들이 살기 위해서 베냐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베냐민을 위해 모든 사람의 희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간단한 일일까요? 애굽에서 남은 삶을 노예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다 해도 집에 있는 아내와 자녀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합니까? 이복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한 사람만 종으로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을 위해 굳이 열 명이 추가로 종이 되어야 할까요? 이상한 일 아닙니까? 왜 이렇게 할까요?
그것은 형제들을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 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된다고 형제들을 둘로 나누려고 하지만, 유다는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함께 종이 되겠다고 하나로 생각합니다. 베냐민의 죄는 자신들의 죄와 같으니 그 대가를 함께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기대했던 모습, 열 한 형제들의 하나 된 모습입니다.
형제가 하나 된 모습, 가족이 하나 되어서 함께 하는 모습,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하나 되어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고, 함께 슬픔을 나누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형제끼리 틈만 나면 싸우고 서로 잘했다고 따지고 서로의 잘못을 일러주기에 바쁘면, 부모로서 그런 모습을 볼 때 어떻습니까?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냥 다 패주고 싶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녀들이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고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부모로서 그것처럼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생각, 하나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 아닐까요?
현재 상황은 어렵지만, 형제들은 하나 되어서 이 난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요셉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종이 되겠다는 유다의 말에 요셉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17)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요? 이 말대로 하면 그들은 평안히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곡식을 들고,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곳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으로 평안히 갈 수 있습니다.
여기 “평안히”라고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베냐민을 두고 돌아가면, 정말 평안할 수 있을까요? 약속을 저버리고 베냐민을 두고 돌아온 그곳에서 ‘샬롬’이 있을까요?
이렇게 일이 심각하게 진행되는 동안 특이한 것은 정작 누명을 쓰고 있는 베냐민은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이나 결백을 외치는 말도 없습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베냐민의 말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옛적에 요셉이 형들에 의해 상인들에게 팔릴 때와 같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 일을 서로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 형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베냐민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해서, 베냐민의 말에 의해서 형들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그들의 변화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요셉은 또 한 번 베냐민만 남기고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유다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장엄하게 설명합니다. 18절에서 34절까지는 유다가 요셉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말인데, 창세기에서 가장 긴 말입니다.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될 것이니 고향에 계신 늙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선처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베냐민을 위한 그의 중보는 형제를 향한 사랑과 아버지를 향한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 종이 되든지 애굽의 총리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입장에서는 베냐민이 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합니다.
유다의 이런 감동적인 호소를 듣고 요셉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버티면서 시험을 계속할까요? 아니면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만둘까요? 이어지는 요셉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의 생애가 시작되면서 이야기의 초점은 계속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나서는 이야기의 초점이 요셉의 형들에게로 살짝 옮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초점이 형제들 중에서도 유다에게로 조금 더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을 살리기 위한 유다의 리더십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유다의 리더십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유다가 어떤 일을 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다’라는 동사가 8번이나 반복되는데, 베냐민 자루에 은잔이 발견됨에 따라, 그들의 악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발견된 악은 야곱의 가정에 영향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 악이 아버지에게 미치는 것을 막으려합니다.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그것을 막으려 합니까? ‘희생’입니다. 악이 자신의 가족에게 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자기희생’입니다.
요셉의 시험을 통해 형들은 자신들이 변화되었고, 동생에게 지은 죄를 회개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가족을 위한 자기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비록 야곱의 가정은 죄악으로 인해 크게 상처를 입었고 깨어졌지만,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품고 자신을 희생한다면 병든 가정은 치료되고 가정의 아픔은 회복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서로를 향한 희생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어려운 시험에 통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형제에 대한 미움은 악을 부르지만, 그런 악을 막는 것은 희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 죄가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면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그 사랑을 실천할 때,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이 속한 곳에서 뭔가 긍정적인 유익을 얻고 있다면, 뭔가 만족을 얻고 있고, 뭔가 편안함을 얻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으로부터 얻은 결과입니다. 누군가가 희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혜택을 내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희생 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나의 희생이 없다고 그것이 그냥 주어지는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는, 사랑의 수고가 없는 곳에는 어떠한 만족도 없습니다.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어떠한 유익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아내의 희생이 없다면 가정은 건강한 모습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희생하기 때문에 가정에 ‘샬롬’이 있는 것입니다. 혹시 아내로서 내가 별다른 희생을 하지 않는데 그래도 우리 집에는 별문제가 없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계십니까? 그런 경우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내로서 해야 하는 희생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든지, 아니면 아내의 희생이 없기 때문에 가정의 문제가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의 희생이 없다면 어떨까요? 남편이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며 가정을 뒤로 미뤄두고 자기를 위해 산다면 어떨까요? 그 피해는 가족 모두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악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뭔가 유익을 얻고 계시다면 그 유익은 누군가가 수고하고 희생하고 있기 때문에 얻은 것입니다. 그런 희생이 없다면 교회는 유지될 수 없고,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나의 유익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나를 효과적으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나에게 맞추면, 나의 유익과 만족에 맞추면, 너무도 쉽게 악이 내 삶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원망과 미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삶의 목표가 나의 유익과 만족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있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에 있다면, 그래서 공동체의 유익과 만족을 내 삶의 목표로 둔다면, 그래서 그 목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결국 그 유익과 긍정적인 결과는 공동체에 속한 모두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악이 역사하는 것을 막고 서로의 관계가 더 발전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친밀함이 있습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하나 됨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희생함으로 공동체를 세우며 건강한 관계를 맺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 본받아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