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 다윗
본문: 사무엘상 13장
설교자: 최종혁
다윗은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그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할 만큼 성경 안에서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다윗은 약 60번 정도 언급이 되는데 다수가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알아 본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칭했다. 마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을 소개했고, 바울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라고 설명했다. 예수님 자신도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계 22:16)라고 말씀하셨다. 단지 다윗이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겠다는 소원을 말했을 때 그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는 약속을 하셨다(삼하 7:11). 그 집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다윗의 영원한 왕조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 왕조의 영원한 왕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시고 기뻐하셨고 하나님의 영을 함께하게 하셨던 것처럼(사 42:1) 다윗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으로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였다. 다윗은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의 모형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그런 다윗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렇다.
행 13:22 …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이전 번역 “합한”) 사람이었다. 이 말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가르칠 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면서 한 말인데, 사무엘상 13장 14절의 말씀에 근거해 있다.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다고 말하는데, 그 왕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바로 다윗이다. 즉, 다윗이 하나님께서 찾으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 혹은 합한 자였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이다. 히스기야에게 사용되었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나 갈렙에게 사용되었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합한 자)라는 표현은 다윗에게 특별하게 사용된 표현으로서 우리는 다윗의 삶에서 그 말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배워야 한다.
기본적으로 말 자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에 합한 자’는 ‘마음을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그곳에 자신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예를 통해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다른 대상에게 마음이 합했던 자고,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던 자다.
요나단의 무기 든 자 – 요나단의 마음에 합한 자
흔치 않은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이 사무엘상 14장에 등장한다.
삼상 14: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나는 당신의 마음을 따라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마음에 합하여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가 생각해보자. 당시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군대가 대치해 있던 상황이었다. 명백한 군사력의 차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남은 백성들도 숨어 있던 상황이었다(삼상 13:5-7).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은 과감하게 적진에 뛰어들 계획을 세운다. 사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단지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의 무기를 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사람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지금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다들 무서워서 숨어있는데, 둘이 가서 뭘 어쩌겠다는건가’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죽으려면 곱게 혼자 죽을 것이지…’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블레셋의 가지고 있는 병거와 마병만 해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의 10배가 넘는다(13:5, 15). 실제 군사의 수는 훨씬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무기도 없다(13:19-22). 싸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다들 숨어있는건데, 요나단은 둘이서 그 적진에 뛰어 들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을 요나단이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런 요나단에게 병기 든 사람이 한 말이 이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하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나는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합니다. 당신이 가겠다면 나도 가고 당신이 가지 않겠다면 나도 가지 않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말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올라갔고 무기든 자도 그를 따라갔다(14:11-15). 하나님은 이 일을 시작으로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요나단의 무기든 자는 요나단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상황이나 생각보다 요나단의 마음을 우선시하고 그의 마음에 따라 행했다. 이것이 마음이 합한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윗에게 있어 그 마음이 합한 대상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성경의 다윗에 대한 평가다. 요나단의 무기든 자가 요나단의 마음에 합해서 요나단의 뜻에 따라 움직였던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그 뜻을 이루셨다. 당연한 얘기지만, 언제나 온전히 그렇게 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는 다윗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만한 사람은 사울이다.
사울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자
삼상 13:14에서 사무엘이 한 말에는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사실 사울은 사람들이 원했던 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에게 나아가서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라고 요청했다. 왕을 세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왕에 대한 규범도 주셨다(신 17:14-120).
하지만 사무엘은 그들이 왕을 원하는 동기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삼상 8:6-7). 그들이 원했던 왕은 그들의 왕이었고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해줄 수 있는 왕이었다. 사무엘은 그들이 그런 왕을 세우면 오히려 더 힘들어 질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그들이 원하는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삼상 8:19-20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들은 계속해서 “우리”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들이 말한 왕의 조건은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주신 왕의 기준에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왕을 세우라고 하셨지만, 이 백성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로의 변화를 요구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왕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왕을 원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기로 하신다.
삼상 8:21-22 [21]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이렇게 세워진 왕이 사울이다. 사울은 정확히 그들이 원했던 그런 왕이었다. 그는 유력한 집안의 자제로서 아주 잘 생기고 키가 큰 사람이었다(삼상 9:1-2). 누가 봐도 왕으로서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으로 세움을 받고 리더쉽을 발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11장). 이 일을 통해 백성들은 사울이야말로 우리가 원했던 바로 그 왕이라고 인정하게 된다(11:12-15).
사무엘은 그의 은퇴 연설에서 사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상 12:13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긴 하셨지만, 그 왕은 백성들이 구하고 그들이 택한 왕이었다. 사울은 사람들이 원했던 왕이었고 그들이 원했던 기준을 충족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바로 이어지는 13장이 사울의 그런 면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었고, 대군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숨어서 떨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엘은 7일 후에 합류해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이 할 일을 알려주겠다는 말을 전했었다(10:8). 그래서 사울은 7일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7일째까지 기다렸다.
7일째가 되었는데 사무엘은 곧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사울은 백성들에게 7일째가 되면 사무엘이 올 것이고 그럼 지금의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빨리 나타나지 않자 백성들은 흩어졌다(13:8). 그러자 사울은 리더십을 발휘하여 자신이 번제를 드렸고, 번제를 드리자 곧 사무엘이 도착했다(13:9).
사무엘은 바로 어떤 일이 벌어진지 알아챘다. 그래서 사울에게 물었다.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사울은 이렇게 말한다.
삼상 13:11-12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여기 사울의 말을 보면 그가 본 상황이 있고 그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있고, 그 생각에 따른 결정과 행동이 있다. 사울은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고, 사무엘이 정한 날에 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믹마스에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그가 본 상황이다. 그 상황을 종합해서 사울은 이제 곧 블레셋 사람이 나를 치러 이곳으로 올 것이고 군사력에서 밀리는 내가 믿고 있는 신의 도움도 받지 못하면 당연히 패배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생각에 따라 사울이 결정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어기고 스스로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다. 그는 이 선택을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표현한다.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이런 사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분명한 말씀을 주셨는데, 사울은 그것을 어기면서 즉,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하나님께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사울이 진심으로 생각한 한 것이라면 그는 참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그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백성들을 모두 도망치게 하든지, 아니면 블레셋과 화친을 도모하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이상하게 자신이 직접 번제 드리는 것을 선택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 백성들 앞에서 사무엘 없이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왕으로 보여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사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되었다.
사울이 보았던 상황은 문제가 없다. 모두 사실이다. 그 상황에서 그가 생각했던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이었다. 블레셋은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 블레셋의 군대에 맞써 싸울 힘이 그에게 없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그는 선택해야 했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했던 말을 믿고 계속해서 기다리든지, 아니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다른 어떤 조취를 취하든지 선택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 자신의 판단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판단을 따랐다.
사울은 상황 때문에 ‘부득이하게’ 번제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요나단에 대한 말씀을 보라. 요나단도 사울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요나단은 그의 계산에 ‘하나님’을 두었다. 그래서 결론이 사울과 달랐다. 그리고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을 요나단을 통하여 이루셨다. 사울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셨다면 그의 결론은 달라졌을 것이고 그가 맞이한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다. 요나단에 대한 기록이 그에 대한 것으로 바뀔 수 있었고, 사무엘의 말에 따르면 다윗에게 약속된 ‘영원한 나라’가 사울을 통해 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었다.
단순히 여기서 한 번 불순종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이후에 사울은 계속해서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이유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했지만 자신의 방법대로 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사울이 계속해서 추구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있지도 않은 중간 지점을 추구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생각을 더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 중간 지점에서 하는 일들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마음에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그것을 몰랐거나 애써 외면했다.
요나단의 무기든 자를 다시 생각해 보라. 그의 말은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소서. 나는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였다. 요나단의 마음이 그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결정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그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다.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열매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그에게서 끝나게 하셨다. 그리고 다윗을 세우셨다. 사울과 다르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따랐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다윗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 하나님의 이름을 우선시한다. 내 생명보다.
- 하나님의 명령을 우선시한다. 내 생각보다.
-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그 누구보다.
도전
한가지, 사울의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했던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는 것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보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합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그와 같지 않은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에 하나님도 동참해서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럴 수는 없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합하실 수 없다.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합하실 수 없다.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그것을 우리는 원해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정작 그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한 왕 사울이 그러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뜻을 따랐을 때의 결과가 그러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속는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지키라고 한다(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고 해를 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곳에 적응하여 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덧붙이신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사람들이 듣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포로로 잡혀갔으면 거기서 빨리 탈출해야 할 것 같은데 그곳에 정착해서 살라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도 동일하다.
신 10:12-13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무거운 계명이 아닌가? 아니다.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들릴 수 있지만 아니다. 내 마음에 속지 말라. 오히려 우리가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하나님은 제시해 주신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생각이나 삶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다. 그 말씀 안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 된 마음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내 마음의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기를 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사울이 그랬다. 우리가 그들의 실패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셨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시 37:4).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하기를 원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를 추구하라. 그 안에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