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믿음 안에 있는가
본문: 고린도후서 13장 5~7절
설교자: 조정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읽고 묵상하다보면 우리 중에 이 심판을 맞이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일 인자의 날이 우리 때에 일어난다면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는 교회가 휴거될 때 이 땅에 남겨지고 대환난을 지나 인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진노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가운데 그 진노의 자녀가 있다는 사실은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치 자식들이 바다에 빠졌을 때 누가 건짐받지 못할 것같냐고 묻는 질문처럼, 인자의 날에 누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냐는 질문은 참으로 가슴 아픈 질문입니다. 제 진실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같이 이 가운데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벧후 3:9).

그러나 이 가운데 아직도 회개에 이르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니까, 성경을 딱히 부정하지 않으니까, 여러 봉사를 하고 있고 심지어 헌금도 하니까 나는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 스스로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과 마주합니다. ①우리는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②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사항은 바로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점검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형 동사는 우리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점검하고 확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참된 믿음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참된 믿음 안에 있는지 여부는 언제나 시험과 확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 검진 자체가 건강을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검진하는 것은 좋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점검하는 것이 없던 믿음을 갖게 하지 않지만, 가지고 있는 믿음의 진실성은 반복적인 시험과 확증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권면합니다.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하셨습니다(마 7:20). 믿음 안에 있는 자는 맺는 열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약 2:14). 타락한 천사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고 두려워합니다(약 2:19). 그러나 열매 없는 그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참된 믿음 밖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믿음 밖에 있는 자입니다. 인자의 날에 준비되지 못한 자로 심판을 받을 자입니다. 진노의 자녀입니다(엡 2:3).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 자라고 생각할까요? 6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버림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6절)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고후 1:1)를 포함한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그 시험을 통과하여 믿음 안에 있다는 사실이 확증된 것을 너희가 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랑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리새인처럼 겉으로 잘 짜여진 종교적인 삶을 살면서 ‘이 정도 살아야 의롭다고 말할 수 있지~’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일까요? ‘나정도 살아야 믿음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라며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오히려 바울이 그들 가운데 인정받지 못할지라도(“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고린도 성도들은 진짜 믿음 안에 있는 자처럼 사는 것, 그렇게 믿음이 확증된 자로 살아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의 두 가지 특징을 말씀드리기 원하는데,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여 진짜라는 것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인자의 날 심판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 있는 자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7절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에서 두 가지 구분되는 그러나 분리할 수 없는 특징을 발견합니다.

 

  1. 악을 멀리함(7절)

먼저 바울은 이렇게 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고후 13:7)

믿음 안에 있는 자의 첫 번째 특징은 바로 악을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을 눈 여겨 보십시오.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 안에 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롬 6:2).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정말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원치 않는 죄를 범하는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받고 싶다고 탄식합니다(롬 7:24). 요한 역시 ‘나는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1:10).

죄를 절대로 지을 수 없는 완벽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당연하거나 자연스럽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 8:13)고 말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서 어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그 명령을 주는 이유에 관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가 행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한 발 더 나아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합니다(요일 3:8).

어쩌면 여러분은 너무 빡빡한 거 아닌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어. 연약한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죄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 밖에 있는 사람에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요 8:34).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모든 죄에서 사함을 입은 자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는 우리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더럽고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그 죄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죄는 여기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호등을 어기거나, 형제를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못하고 오래 화해하지 않는 것, 형제 자매끼리 파를 만들거나, 나뉘거나, 술과 담배에 중독되어 있는 것, 영화나 음란물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을 알지만 적당히 줄여나가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 삶에서 완전히 떼어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그런 느슨하고 나약한 기준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기자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히 12:4). 바울 역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골 3:5). 바울의 고백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롬 8:13).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죄와 친해져서는 안 됩니다.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를 버림받는 심판의 자리로 끌고 가는 적군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윗처럼 상한 심령으로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두둔하지 마십시오. 구약시대 하나님의 제단에 돼지 머리를 올려 둔다면 얼마나 부자연스럽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담아내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한 번은 상담 중에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상대방이 예의 없이 거의 사고를 낼 것처럼 들어오면 속에서 분노가 쏟아져 나오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상담을 하던 친구는 “당연하지요. 사람이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당연합니다.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분노와 욕설을 퍼붓는 죄를 쉽게 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믿음 안에 있는 자에게 그것은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죄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그 죄로 인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가 내 죄로 인해 손이나 팔을 잃었다면 우리는 그 죄를 계속해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주가 우리 죄로 인해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죄를 우리 삶에서 끊어버리기 원하셨다면 주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우리 역시 죄를 멀리하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믿음 안에 있다고 입술로 말하면서 죄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기며 즐기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고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여러분의 믿음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다시 말하면 바울은 버림받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자로 확증된 삶을 살기 위해 악을 멀리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확실한 증거, 그 첫 번째는 바로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1. 선을 행함(7절)

두 번째 특징은 7절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7절)

두 번째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옷을 입게 하려고 구원하셨습니다(엡 4).

이전에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자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벧전 2:9). 우리의 새로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제물이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롬 12:1-2).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에베소서에서는 성도를 가리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엡 4:10). 이것이 믿음 안에 있는 자의 분명한 특징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성경 전반에 걸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그 복잡한 제사제도, 사회법, 도덕법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복잡한가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부터 이웃집 경계선을 옮기지 않는 것, 공평한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 심지어 문어를 먹지 않는 것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르게 살기 원하셨습니다.

신약의 백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신서마다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엡 4:29),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롬 13:1), 친절하게 여기라, 서로 용서하라(엡 4:23). 남편에게 순종하라(벧전 3:1). 아내를 귀히 여기라(벧전 3:7).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엡 6:1; 골 3:20).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살전 4: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신약성경에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이 우리 안에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믿음 안에 있는 자의 특징은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힘쓴다는 것입니다.

하워드 헨드릭스가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소개한 간증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에디오피아 남자, 완다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선교사가 성경을 가지고 완다로가 사는 마을에 찾아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완다로는 그 메시지를 듣고 곧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사탄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선언합니다. 침례를 받고 읽는 법을 배운 뒤 성경을 조금씩 더 배웠습니다.

완다로의 삶은 조금씩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그의 갓난 아들이 열병으로 죽어갈 때 심령술사가 마귀에게 제사를 드리자고 말했지만 완다로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마귀에게 제사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죽었고 마을 사람들은 관습대로 의식을 시작했습니다. 소리 지르고 울고 자기 살을 베었습니다. 완다로는 그들에게 뛰어가 소리쳤습니다. “멈추시오. 나도 나의 아이가 보고 싶소.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죽음에 대해 평화를 주셨소. 나는 내 아이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안전하다고 믿소.”

1936년 이탈리아 군대가 완다로의 나라를 점령하고 선교사는 추방되었습니다. 그 마을에 완다로를 포함하여 48명의 믿는 자가 남아있었습니다. 침략자들과 그들을 동조하는 에디오피아 사람들은 단 한 명의 신자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극심한 핍박을 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체포되고 구타당하고 모든 재산은 몰수당했습니다. 교회도 불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완다로와 신자들은 더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더 많은 사람이 믿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결국 도게사라는 정부관리가 완다로를 본보기로 삼아 교회를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도게사는 교회 건물을 파괴하고 완다로를 체포하여 마을 한가운데서 매질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라고 협박했으나 완다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도게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완다로의 말을 따르지 말라 이 자가 묶여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의 교회에도 가지 말라. 그 교회를 불태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완다로는 같이 소리쳤습니다. “이 밧줄은 마지막 심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사람이 나를 묶은 것에 불과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죄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여러 번 매질을 당하고 남자 다섯이 그를 세 시간 동안 때렸습니다. 나중엔 대나무로 만든 우리에 가두고 1년 동안 감금 상태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완다로는 드디어 석방되었는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모아 정부 관료인 도게사의 밭으로 가서 추수를 도왔습니다.

1942년 선교사가 다시 입국 허가를 받아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약 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원망, 불평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삶, 정부에 순종하면서도 진리를 외치는 삶. 그것이 수많은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주위에 비추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듭니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의 삶을 지켜본 결과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숫자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열정에 대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열심히 선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선한 일을 행하는 자입니다.’

 

  1. 주를 사랑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 밖에 있는 사람도 죄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를 팔고 나서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기 목숨을 끊었습니다. 믿음 밖에 있는 사람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법대로 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만큼 예수님의 저주를 많이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진짜 믿음 안에 있는 증거가 되게 하는 것은 세 번째 특징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악을 멀리해야 하니까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멀리합니다. 우리는 단지 선을 행해야 하니까 그것으로 뭔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내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묻지 않으셨던 질문을 베드로에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대답합니다. 예수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진정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싫어하시는 죄가 밉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당신께 나의 사랑을 드리기 원합니다. 그것이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성경의 모든 명령은 단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순서상 먼저 오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말과 삶으로 다 표현하지 못해도 사랑합니다. 어린아이가 점점 자라며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처럼 조금이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묻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 너희가 알지 않느냐?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압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그 사랑 안에 거함으로 압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 그 누구도 버림받는 자가 없기를 원합니다.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기가 버림 받은 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생의 주변을 맴돌다 멸망으로 끝나는 인생이라면 말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보십시오. 시험해보고 확증하십시오.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물으십시오. 악을 미워하고 멀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열심히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버림받은 자입니다. 인자의 날, 예수께서 경고하는 무서운 진노는 여러분을 어느날 갑자기 덮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돌이키십시오. 도망치십시오.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에서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보고 영접하십시오. 믿음 밖에서 믿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