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 나라 복음의 비밀
본문 : 누가복음 7장 1~15절
설교자 : 최종혁
복음을 전하다보면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왜 좋은 얘기를, 이 귀한 소식을 이들이 안 받아들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능력을 맛보았던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메시야의 말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이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근본적인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별로 비밀 같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누군가는 기쁨으로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거절합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계속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말입니다. 그 나라가 임하고 메시야가 오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그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그 메시야를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 알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왔던 세례 요한마저도 알지 못했던 비밀, 하나님이 철저하게 감추고 계셨던 비밀입니다.
그들이 몰랐던 이유는 당연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멀리서 산봉우리를 보는 것처럼 봤다고 말합니다. 멀리서 보면 산봉우리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초림과 재림에 대해 구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것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중간의 골짜기는 생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메시야의 나라는 재림 때에 이뤄질 나라였는데 그 앞에 있는 봉우리를 그들이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으로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그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의 백성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나이, 성별 상관없이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믿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놀라운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 2:7)”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셔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거절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먼저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영광 받으시기 전에 고난 중에 계셔야 했습니다. 바로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교만과 무지함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라고 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6-10)” 이렇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이 수정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만세전에 예배하신 것으로 단지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절을 통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졌던 비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거절한 자는 그대로 거절하게 두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자는 알게 하시려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상으로 갈릴리 쪽에서 사역하고 계시는데 중후반으로 가고 있고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지 1년 반 정도 흘러온 시점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결심을 하시는 시점입니다. 그냥 가시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이곳저곳으로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선포하셨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바쁜 삶을 사셨습니다.
그 일에 12제자가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름 외에는 그들이 했던 일이 특별히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 시점부터는 제자들의 행적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폭을 조금씩 좁히십니다. 그리고 그 깊이를 더하십니다.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더욱 시간을 보내십니다.
2-3절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열두 제자만이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소유로 자신들의 시간을 들여 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가 생각나는 사람을 아무나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몇 번 더 언급되는데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관련해서 나옵니다. 그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 무덤에 묻히실 때, 시신에 향유를 부으려고 했을 때 등장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났을 때 예수님께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안나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왕입니다. 그의 청지기이니 재정을 맡은 사람입니다. 매우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시며 전하실 때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있던 사람들도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수산나는 그저 이름만 등장합니다.
당시 이런 일은 흔한 일이었지만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소유로 섬기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계속해서 선포되었습니다. 큰 성, 작은 마을 모두에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4절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보면 바다에서 설교를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5절-8절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비유는 익숙한 일상을 통해 특별한 영적 진리를 담는 표현입니다. 농사짓는 것을 통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날 이런 식으로 씨를 뿌리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자루채로 씨를 뿌리는 행위인데 씨가 이곳저곳에 뿌려지는데 어떤 곳에 떨어지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밭이 있는데 사이에 길이 있어 그곳에 떨어집니다. 흙이 다져져서 단단하게 된 길입니다. 당연히 잘 심겨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산지를 가면 땅 바로 아래 큰 바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땅의 특징은 습기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빨리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음의 경우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잡초 뿌리가 같이 섞여있는 경우입니다. 가시떨기는 힘이 세서 주변의 영양분을 빨아옵니다. 마지막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씨가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풍성한 결실입니다.
마지막 땅과 다른 땅의 차이는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비유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잘 새겨들어라 라는 의미이고,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 가운데 들을 귀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설명 없이 이 비유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비유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이 비유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9절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마태복음을 보면 뜻뿐만 아니라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도 묻습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10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가 모두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너희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심판입니다. 거절하는 자는 더 알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11절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12절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그 길이 단단해서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 그 땅의 특징이었습니다.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데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을까요?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권위 있는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단단했습니다. 교만으로 다져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갑니다. 이런 유의 사람들이 당시에 있었습니다. 거절하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능력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에 꼬투리를 잡았고 죄인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단단해져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의도적으로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믿지 않으려고 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기회는 열려 있지만 심판이 언제 이를지 모릅니다. 그런 단단한 마음이 있다면 그런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단단한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13절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싹은 나지만 곧 마르는 것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의 기록을 보면 이들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거기서 멈춥니다. 시련이 왔을 때 넘어져 일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따라다니는 사람들, 기득권층에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좋아서 따라다니는 사람들, 병 고치는 것,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좋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을 때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뿌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것에 믿음의 기초를 두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 겉모습만 보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기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회개의 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의 생각과 다를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지만 순종하고자 한다면 이런 밭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안 들어. 내 생각과 달라’라고 하면서 바위를 드러낸다면 이런 밭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마음에서 말씀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14절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열매 맺기에 가까이 이르지만 아직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땅에 씨앗이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염려에 관심이 많고, 재물, 쾌락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관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성도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부자청년은 근심하여 떠났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재물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손해 보지 않으면서 영생을 얻는 것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하나님보다 더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믿음이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앞에서 말씀하신 문제가 있는 땅이 아닙니다. 교만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된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피상적인 기쁨, 순간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씀이든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러한가 상고하는 마음, 우선순위에 다른 것이 놓인 것이 아닌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열매로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는 마음의 태도와 그에 따르는 삶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볼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열매는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년이 지나도 마음에 동기는 있는데 보이는 것이 없다면 점검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좋은 땅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했던 백부장의 모습이 그러했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세리 레위가 그러했고,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향유를 부었던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믿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당시의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거절했습니다. 메시야께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사람들의 상태가 이와 같아서 그분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착하고 좋은 마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열매 맺는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오실 때가지 이렇게 진행될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동일하게 이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밭입니까? 어떤 밭이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분이든 아니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나오면서 내 생각에 맞는 말만 듣기를 원한다면 잘못입니다. 순간적인 만족에 그친다면 잘못된 만족입니다. 그것을 채우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여전히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교만하여 단단하고 세상 것에 매여 있고 여전히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그러하다면 믿음을 점검해보십시오. 더러 그런 부분이 있다면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두 개의 땅에 대해 말하는데 합당한 채소를 내는 땅과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9-10)” 열매를 맺는 과정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힘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12)”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처음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서 참된 구원받은 자로서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구역모임을 위한 질문들
1. 예수님의 사역에 많은 사람들이 동역했던 모습을 생각해보며, 현재 교회의 사역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면에서 더 섬기기 원하는지 나눠보세요.
2. 복음을 전할 때, 세상에 다양한 땅(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됩니까?
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태도와 가장 유사한 땅은 어떤 땅입니까?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떤 기도가 필요할까요?